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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의 일과는 보통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다. 특히 여름의 경우 점심시간이 지나가면 기온이 40도 넘게 급격하게 올라가 일을 도저히 할 수 없게 된다. 호주의 땅덩어리가 워낙 크다보니 지역마다 편차는 있지만 대게 여름은 어딜 가나 덥다.

나의 첫 농장에서의 일은 오전 6시부터 시작되었다. 포도 농장은 마을에서 약 12km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했다. 농장에서 일을 하려면 도시락도 알아서 싸가지고 가야하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준비된게 없었다. 첫날이니 가볍게 전날 식빵 몇 개에 잼을 발라놓았던걸 가지고 갔다.

텐트에서 잤던 그 날 아침 상큼한 공기를 마시며 일터로 나가고 싶었지만 사실 밤새 너무 추워서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한동안 계속 추위에 몸부림을 쳐야했을 정도였다. 이거 완전 강원도에서 생활했던 나의 군대 생활이나 마찬가지 아냐?

드디어 첫 출근이다. 약 15분정도 차를 타고 농장을 찾아가니 규모가 굉장히 컸다. 운동장 넓이의 포도밭이 몇 십개 있을 정도로 넓었는데 그 넓었던 포도 농장보다 그 사이로 캥거루들이 뛰어다니고 있던게 더 신기했다. 생전 처음보는 야생의 캥거루에 무척 신기했다. 캥거루들은 무리를 지어 이동했는데 얘네들이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빼꼼히 쳐다보는 모습이 마치 낯선 외지인을 보는 사람같았다.

오피스에 찾아가 각종 서류를 작성하고, 곧바로 투입되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텐트 생활이었지만 이렇게도 쉽게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체험기를 읽어보면 대부분 초반에 일을 못구해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포도 수확은 우리가 일을 시작했던 그 날이 처음이라 슈퍼바이저들이 일에 대해 설명해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일도 시간제로 시작했다. 원래 호주 농장의 시스템은 대부분 컨츄렉(능력제)으로 예를 들어 포도를 많이 수확하면 수확할 수록 돈을 더 많이 받는 형태이다. 이게 말은 참 좋고 돈을 많이 버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그 뒤에는 쉬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돈 아깝다는 생각에 미친듯이 하게 만든다. 게다가 돈을 잘 버는 사람은 항상 정해져 있다. 그만큼 농장 일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새벽부터 시작된 일은 오후 3시가 되어서 끝이 났다. 낮이 되자 정말 더워서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처음하는 것 치고는 일이 어렵지 않다고 느껴지기는 했지만, 오후 들어서는 갑작스러운 무더위에 급격히 힘들어졌다. 원래 평소에는 긍정적인 성격이 아니긴 하지만, 내가 악조건이 되면 굉장히 긍정적이 되어버린다.

그 날 나는 포도 20박스를 겨우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갈 무렵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컨츄렉으로 전환되면 박스당 가격은 1.2불이 될거라는 말이었다. 가만... 계산을 해보자. 1.2 * 20이면 24불. 엥? 뭐라고 고작해야 24불이라고?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숙련되어서 30박스를 하더라도 36불일테고 40박스를 하더라도 48불 밖에 되지 않는 계산이 나왔다. 나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닐거라며 신중하자는 입장을 취했지만 같이 왔던 형은 굉장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실제로 24불처럼 말도 안되는 금액을 받은 적은 없다)

캐러번파크로 돌아와 씻고, 저녁으로 또 라면으로 때우고 10시가 되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 날 밤도 역시 얼어 죽을뻔 했다. 그랬다 우리는 가장 필요했던 침낭이 없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