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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시암까지 걸어갔던게 무척이나 피곤하긴 했는지 대낮부터 쓰러져 잠이 들었다. 선풍기가 내 침대쪽으로는 거의 오지 않아서 가뜩이나 후덥지근한 날씨가 더 덥게 느껴졌다. 내 의지로 잠에서 깨어났다기 보다는 너무 더워서 일어났다고 보는게 맞았다. 그럼에도 이미 5시에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밖에서 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나 역시 입구 앞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폴 게스트하우스는 내가 적응하기 좀 힘들었다. 그 이유는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비해 장기여행자 혹은 장기체류자들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사람과는 이야기도 하고, 가끔 밥도 같이 먹으러 갔다.

태국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던 형, 그리고 인도를 가기 위해 비자를 신청해 놓으셨던 아저씨 한 분과 이야기를 했다. 아저씨가 커피 한 잔 마시자고 해서 내가 주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타서 나왔는데 한 모금 마시고는 "세상에 이렇게 맛없는 커피는 처음 먹어본다"라며 웃으셨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왔던 한 여자분이 식사를 하러 간다고 해서 내가 따라서 나갔다.


12월 31일, 2009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태국에서도 여느 나라와 같이 연말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축제라도 벌어지는듯 곳곳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카오산로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람부트리거리에서도 무대가 설치 되어 있었고,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죽을 먹었다. 이렇게 가끔은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분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태국에서 오래 머물고 계셨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라고 하셨다.

죽으로는 한끼 식사를 대신하기도 어렵기도 했지만, 사실 이것만 먹고 들어가기는 아쉬워서 그냥 가볍게 맥주 한 잔 하자고 했다. 카오산로드를 지나가는데 원래도 이 거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연말의 기분을 내는 사람들이 몰려서 그런지 더 많아 보였다. 그 사람들을 뚫고 지나 람부트리 거리의 노점에서 맥주를 마셨다.

우리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그 때였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Are you Korean?"이라는 말로 관심을 보이는 여자 2명이 있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 자신들은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서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니 한국인인거 같아서 말을 걸어봤다는 것이었다. 너무 신기해서 계속 대화를 나누다가 나중에는 아예 같은 테이블에서 함께 맥주를 마셨다.

"Happy New Year를 한국말로는 어떻게 말해요?" 프랑스인이었던 이 친구들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가지고 있던 메모지에 영어로 적어주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알려줬더니 재미있다는 듯이 계속 반복해서 말을 했다. 그리고는 프랑스어로도 우리에게 알려줬는데 내가 정확히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 나니'라고 했다.

맥주를 꽤 많이 마시다가 함께 왔던 여자분은 숙소로 돌아간다고 해서 갔고, 나와 프랑스 여인 2명과는 계속 맥주를 마시다가 짜오프라야강변으로 향했다.


조용히 출렁거리던 짜오프라야강변 앞에 걸터 앉아서 담배 하나를 피던 마리나는 나에게도 건네줬다. 담배를 전혀 피우지도 않았던 나는 이상하게 그걸 받아들고 몇 모금 마셨다. 깊게 들이마신게 아니라서 그런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물론 난 담배를 여전히 싫어하는 비흡연자이다.

그것보다 그냥 강변에 앉아서 바람을 쐬는 것이 좋았다. 적당히 맥주를 마셨고, 연말의 분위기에 사방이 시끄러워도 방금 전에 만났던 이 외국인들과 함께 바닥에 주저 앉아 있다는게 무척이나 이국적인 느낌이 들어서일 것이다. 우리는 잠시 뒤에 일어나서 아까 전에 맥주를 마셨던 그 곳으로 돌아가 다시 또 마셨다.


12시가 막 지나자마자 갑자기 '펑펑~ 펑펑~ 콰르르'소리가 들리더니 불꽃쇼가 펼쳐졌다. 드디어 2010년 새해가 시작된 것이다. 원래 카오산로드의 밤이 조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날은 더 심했다. 몇몇 사람들은 술에 취해 뛰어다니기도 했고, 주변 사람들을 향해서 종이 조각을 뿌리기도 했다.

우리 셋이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옆에 있던 네팔인도 우리의 대화에 동참하고 싶은지 계속 말을 걸기도 했고, 지나가던 프랑스인도 아는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맥주를 몇 잔 더 마신 뒤에 우리끼리 카오산로드를 걸었다.



평소보다 사람이 몇 배는 더 많아 보였던 카오산로드를 걸었다. 마치 축제의 현장에 들어선듯 시끄럽고 복잡했지만 왠지 모르게 신이 났다.



우리는 카오산로드의 끝까지 걸어간 뒤에 한 레스토랑에 앉아 다시 맥주를 한 병 마셨다.


수박과 파인애플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는 옆테이블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함께 사진도 찍었다. 분명 여행을 하다 만난 짧은 인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늦은 새벽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들은 모레 한국으로 들어가야 해서 휴가가 끝난다고 무척 아쉬워했다. 한국에서 교사로 지내고 있다고 했는데 나중에 한국에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우리는 복잡한 카오산로드를 빠져나가려 하는데 아린이 팟타이가 먹고 싶었는지 하나 샀다. 팟타이를 우리는 걸으면서 나눠 먹었다.


카오산로드의 새해는 늦은 새벽에도 지치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와 겨우 샤워를 하고 누웠는데 우리 방에서 지내던 여자 2분이 들어왔다. 도미토리는 남녀 구별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는데 여기 게스트하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 한 분은 내가 미얀마 여행을 간다는 것과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왔다는 것을 알고 이것 저것 물어보긴 했는데 너무 늦은 밤이라서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분이 검색으로 우연히 내 블로그를 찾아와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태국에서 아주 잠깐 프랑스인과의 인연은 한국에 와서도 계속 이어졌는데 최근에 무려 2번이나 다시 만났다. 위의 사진은 불과 지난 주말에 만나 바베큐 파티를 하면서 찍었던 것이다. 외국인이 훨씬 많았지만 이 사진의 장소는 분명 한국이었다. ^^; 짧은 인연이라도 언제 어디서 이어질지 모르는 것이 바로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관련글 : 2010/04/29 - 서울에서 다시 만난 프랑스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