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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를 여행하기 직전이었다. 태국에서 미얀마 비자를 받고, 미얀마행 왕복 비행기표도 구입을 다 마친 후 이제 날아가기만 하면 되는 그런 상태였다. 본격적인 미얀마 여행이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여행을 한지 이미 일주일도 넘은 시점이었는데 문제는 즐겁지 않았다. 정말 이상했다. 분명 여행을 떠나면 무지하게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미얀마로 출발 직전 나의 방콕 생활은 이랬다. 게스트하우스 사람들과 노닥거리거나 혼자 짜오프라야강 앞에 가서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밤이되면 카오산로드를 걸으면서 팟타이와 함께 맥주를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그게 여행인지 일상인지 모를 정도로 아주 평범했던 것이다.

12월 31일, 그날도 비슷했다. 그나마 이번에는 저녁을 같이 먹을 사람이 생겼다는 정도가 조금 달랐을 뿐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과 함께 저녁을 먹고, 늘상 가던 거리의 노점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카오산로드에 오면 항상 나는 람부뜨리 거리에 있던 노점에서 맥주를 마시곤 했는데 여기가 가격도 저렴하고, 카오산로드 보다는 시끄럽지 않아서 좋았다.

이렇게 처음 만난 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바로 옆에서 앉아있던 서양인 여자 두 명이 우리를 쳐다보면서 "한국 사람이예요?"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마치 같은 국적의 사람을 만난 것처럼 큼지막한 눈을 껌뻑이며 우리에게 묻는데 아주 깜짝 놀랐다. 어떻게 한국 사람인줄 알았냐고 물어보니 자신들은 지금 한국에 있어서 우리의 목소리가 한국어로 알아 들었다는 것이다.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자리에 있던 그녀들과 몇 마디를 나누다가 아예 자리를 합쳤다. 그녀들은 프랑스인이었는데 한국에서는 교사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를 여행한 것은 태국이 처음이었고, 이번에는 휴가 기간이라서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장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우울함을 표시했다. 그러니까 휴가의 마지막 날이었던 것이다.

이제 곧 1월 1일, 2010년 새해를 맞이하기 때문인지 이 친구들은 우리에게 "Happy New Year를 한국말로 어떻게 말하는 거야?" 라고 물어봤다. 조금 고민하다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알려주니 어려워 하기는 했지만 계속 반복해서 말을 했다.

"새해! 봉 마니바드세요. 새해! 복... 마닝바드...."

프랑스어로는 '보 나니'라고 알려준다. 덕분에 나도 계속 반복해 말하면서 외울 수 있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니까 상당히 재밌었다. 그리고 뒤늦게 서로 이름을 말하며 소개했는데 곱슬거리는 짧은 머리를 가진 친구는 마리나였고, 태국에서 살 수 있는 싸구려 긴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묶은 친구는 알린이라고 했다.

맥주를 꽤 많이 마셨을 무렵 나와 함께 했던 분은 피곤한지 먼저 들어가겠다고 했다. 남은 우리 세 사람은 맥주를 더 마시다가 짜오프라야 강으로 갔다. 짜오프라야 강변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웠는데 갑자기 나에게도 권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비흡연자였는데도 거부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때? 괜찮아?" 아주 조금 들이마시자 나의 반응을 살핀다.

"글쎄. 특별한 느낌은 없는데? 괜찮아." 이렇게 말하면서 살짝 웃으니 마리나도 웃는다.

우리는 다시 아까 그 노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맥주를 또 마시면서 새해를 기념하는 불꽃쇼를 구경했다. 시끄럽게 터지던 불꽃은 12시가 지났음을 알려줬던 새해 타종과 같았다. 맥주를 한 병 다 마신 후 카오산로드를 걷자는 제안에 취해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걷기 시작했다.

카오산로드는 무지하게 사람이 많았다. 평소에도 취해 비틀거리는 여행자들 천지인데 새해라서 그런지 더 심했던 것이다. 우리는 카오산로드 끝까지 걸어가서 어느 레스토랑에 앉아 또 맥주를 마셨다. 정말 징하게 맥주를 마시긴 했다.


알린이 사온 파인애플과 수박을 안주로 집어 먹었다. 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카오산로드를 구경하다가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부탁해 사진도 찍었다. 시끄러워서 서로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목이 아프게 떠들다가 헤어졌다. 한국에서 꼭 다시 보자고 하면서 말이다.

재밌는 것은 정말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미얀마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지 한참 후였다. 만나는 과정은 정말 속전속결이었다. 알린이 페이스북에서 말을 걸어 안부 인사를 묻던 도중 서로 어디냐는 물어봤다. 서울이라고 답하니 당장 만나자는 얘기에 종로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재회하니 무척 신기하고 재밌었다. 이후에도 나에게 문자를 몇 번 보내서 심심할 때마다 불러내려고 했다. 꼭 일이 있을 때만 불러서 못 가게 되었는데 나중에 자신의 학교 기숙사에서 파티를 한다고 할 때는 가봤다. 외국인 학교 내에서 친구들을 모아 준비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이날도 정말 무지하게 마시고 먹었다. 프랑스인지 어느 나라 음식인지 모를 오래된 고기도 빵에 발라 먹기도 해보고, 와인과 맥주를 계속해서 마셨다. 비가와서 무척 추운 날씨였는데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다들 마당에서 춤추고 난리도 아니었다.


기숙사로 들어와서는 아예 기타를 치며 놀기도 했다. 사실 이때는 버스도 끊기기 직전이라 돌아가려 했으나 이 친구들에 의해 붙잡했다. 기숙사로 들어가서 술을 더 마시자고 했던 것이다. 이러면 거부하기도 힘들다. 이왕 이렇게 된거 더 놀다가 가자고 했는데 기타치던 마리나와 다른 친구들은 노래방을 가자고 제안했다. 갑자기 왠 노래방인가 싶었는데 다들 눈을 반짝이면서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자정을 훌쩍 넘긴 새벽 대부분 외국인이었던 친구들과는 노래방을 갔다. 외국인 친구들과 노래방은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고민했지만 사실 그런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부분 외국 노래였지만, 간혹 한국 노래를 부르던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이 친구들은 노래 자체보다 춤추고, 떠들고, 쉬지 않고 노는 분위기에 푹 빠졌던 것이다.


그 추운 날인데도 노래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에 완전 찜통이었다. 어찌나 뛰었는지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였다. 정말 무지하게 웃기면서도 재밌었던 하루였다.

이후에 알린과 마리나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 갔다가, 아프리카로 갔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아프리카에서 일도 하면서 어떤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 한국이 그립다는 이야기를 몇 번 했었는데 최근에는 미국에 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