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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정말 길었던 날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구마모토성을 보고, 페리를 타고 시마바라로 건너와 둘러보는 것도 모자라 운젠도 다녀왔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점점 날은 어두워지고 있는 지금 최종 목적지인 나가사키로 가야했으니 정말 대단한 일정이었다. 어차피 내가 이런 일정을 잡고 움직였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나 피곤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마바라에서 '잉어가 헤엄치는 마을'을 구경한 뒤 나는 또 미치도록 뛰었다. 자칫하다가 열차를 놓치는 수가 있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정말 다행스럽게 이번 여행에서 열차를 놓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항상 아슬아슬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약 10분 정도 남겨놓고 무사히 시마바라 역에 도착했다. 역에 맡겨놓은 배낭을 찾고 난 뒤 이제 이사하야로 가는 열차를 타야 했는데 역무실쪽에서 표를 구입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바로 옆에 있던 자판기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맨좌측에는 영어로 이사하야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을 누르면 되는 것 같았다. 딱 봐도 이사하야가 맨 마지막에 있고, 가격이 젤 높으니 종착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마바라에서 나가사키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다. 따라서 이사하야로 이동한 뒤 JR노선으로 갈아타 나가사키로 가야만 했다. JR큐슈레일패스를 가지고 있었던 나는 이사하야로 가는 열차는 이용할 수 없었다. 시마바라에서 이사하야까지는 1390엔으로 가격이 좀 비싼편이었다.


이사하야로 가는 열차는 정말 작고 아담했는데 고작 2칸짜리로 이루어진 형태였다. 직감적으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열차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실제로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하교를 하는 학생들이 유난히 많았다. 시마바라 역이 아니더라도 정차하는 역마다 학생들이 계속해서 탔다.


나는 또 졸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열차에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니 저절로 잠이 든 것이다. 물론 계속해서 뛰어다녔던 것도 한몫을 했다. 가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더욱 어두워지고 한적한 풍경만 스쳐지나갔다. 아마 여기는 도시와는 거리가 먼 그런 지역이니까 이 열차도 창밖너머 풍경도 세련된 맛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시골스러운 분위기야 말로 여행자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이 작은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모습, 도시와는 다르게 간간히 보이는 불빛, 그리고 이 느릿느릿한 열차는 나에게 또 다른 경험이자 구경거리였다. 일본에서 이런 곳을 여행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터이니 이것도 나름 색다른 방법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졸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사하야에는 도착하지 않았다. 대략 1시간 20분 걸린다고 하는데 정말 느리긴 무지하게 느렸다. 모든 역을 정차하는 완행열차일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1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뒤늦게 벽에 붙어있는 노선표를 보며 대충 현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배낭을 들고 맨 앞자리로 이동해 앉았다. 여전히 내부에는 학생들이 가득했는데 이사하야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또 다시 올라타기도 했다. 나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 틈에 둘러싸인 꼴이었다.


유심히 학생들을 지켜보다가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여기 학생들은 교칙인지 몰라도 똑같은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남자는 손으로 들고 다녔고, 여자들은 메고 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여학생들은 유행인지 가방에 최소한 1개 이상 커다란 인형 등을 매달고 다녔다. 그냥 재밌다고 느껴졌다.


정말 지루할 정도로 긴 여정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사하야에 도착했다. 아니 이제 다시 나가사키로 이동해야 하니 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난 처음부터 이 보통열차에 탔을 때 정리권을 뽑지 않았는데 그건 시마바라에서 승차권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여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버스에 올라타는 것처럼 정리권을 뽑고, 내릴 때 돈을 냈지만 나는 그냥 승차권을 보여주니 확인증처럼 노랜색 종이를 줬다.


이사하야에 도착했으니 이제는 나가사키로 가는 JR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JR패스가 있었기 때문에 따로 요금을 낼 필요는 없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게다가 나가사키로 가는 고속열차를 탈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것도 이미 다 계산을 했었지만 말이다.


이 열차가 바로 나를 나가사키로 데려다 줄 그 열차다. 드디어 나가사키로 간다.


방금 전에 시골마을의 완행열차를 타서 그런지 몰라도 이 열차는 상당히 세련되어 보였다. 나가사키에 도착하기까지는 아주 짧은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내 앞에 있던 여자 2명과 대화를 조금 주고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나가사키에 언제 도착하냐고 물어보니 이들은 자신들도 나가사키에서 내리니 걱정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한 사람은 내가 들고 있었던 가이드북을 살펴보기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전화를 하다가 이미 진한 화장에 계속해서 덧칠을 하기도 했다.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아까 내 앞에 앉았던 여자 2명과 같이 내리게 되었다. 살짝 비가 내려서 그런지 추위가 엄습해왔다. 내 옆에서 걷던 여자들도 춥긴 추운지 벌벌 떨면서 뭐라고 했다. 나는 출구쪽으로 걸으면서 "일본어로 춥다가 뭐예요?" 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사무이'가 일본어로 춥다는 뜻이라고 알려줬다.

생각해보니 이정도 추위는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긴 했다. 아마도 큐슈는 남쪽이라 따뜻한 편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캉고쿠 모또 사무이(한국이 더 추워)." 라고 말을 해주니 여자들은 꺄르륵 웃으면서 좋아했다.

이들과 이런 짧은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진 후 나는 곧바로 JR사무실로 갔다. 다음날 유후인으로 가는 열차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혹시 로프웨이(케이블카)를 타고 야경을 볼 수 있는 이나사야마공원을 갈 수 있는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JR사무실로 들어가서 여직원에게 유후인으로 가는 열차편을 물어보니 친절히 시간표를 주면서 자세히 알려줬다. 유후인을 가기 위해서는 토스라는 곳을 거쳐 가야 한다고 일러줬다.

유후인으로 가는 열차편을 알아냈으니 이번에는 이나사야마공원에 대해서 물어봤다. 이미 시간은 저녁 7시가 넘어갔고, 비가 오는 악조건이라 야경을 보기는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해줬다. 무척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다른 여직원이 조금전부터 이야기를 듣더니 종이에 무언가 그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의 대답을 듣자 마자 나는 숨이 막힐정도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언뜻 보기에도 정말 어설픈 그림이었는데 어쩌면 나의 그림 실력과 호각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나가사키 항구쪽으로 가면 저런 지형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야경을 볼 수 있을거라는 설명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너무 웃겨서 카메라를 갖다대고 찍으려고하자 JR직원은 "에에에? 대체 이걸 왜?" 라면서 무척 당황해 했다. 아무튼 우리 셋은 이 그림을 보고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사실 그녀도 그림을 그리면서 제대로 설명을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자 웃기긴 웃겼나보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림을 그렸던 직원은 야경을 표시하는 것처럼 별표를 몇 개 더 그려넣기도 했다.

"사진 한장만 찍어도 돼요?"


그녀들은 내 요청에 아주 선뜻 모델이 되어주었다. 내가 들고온 가이드북을 들고 포즈를 취했던 JR직원들 때문에 나가사키에 도착하자마자 아주 재미난 기억을 갖게 되었다. 아무튼 난 저 그림 때문에라도 항구에 가서 야경을 봐야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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