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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은 솔직히 좀 심심했다. 아무리 내가 신나게 노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행자로 변신하면 돌아다니기를 엄청 좋아하는데 하루 종일 호텔에만 있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따뜻한 온천에 들어가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도 정말 순간이었지 혼자 호텔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TV에서 나오는 영화를 보다 일찍 잠들었다. 그나마 영화가 더빙이 되어 있지 않다면 더 좋았을텐데 슬프게도 일본어로 나와서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고즈넉하게 하루를 보낸 돈다바야시를 벗어나 이번에는 열심히 돌아다닐 차례가 왔다. 오사카 시내로 돌아가기 전에 사카이(Sakai-shi)에 들러 세계 최고 수준급인 닌토쿠천왕릉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밤에는 오사카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도톤보리에서 맛있는 음식과 맥주를 먹을 계획을 대충 세웠다.

물론 나에게 칼같은 계획이란 없다. 그저 그럴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추측에 가까웠다. 계획을 해봐야 내 뜻대로 되지도 않을 뿐더러 처음 마주하게 된 오사카란 도시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이후 가이드북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간포노야도에서 돈다바야시역으로 데려다 줄 셔틀 버스가 도착했다. 돈다바야시와 간포노야도를 연결해주는 셔틀 버스는 무료였지만 하루에 정해진 배차가 별로 없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다. 아무래도 배낭을 짊어지고 찾아오는 손님보다는 자가용을 가지고 오는 가족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셔틀 버스에는 어제 나와 같이 버스를 탔던 노부부가 있었다.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온천을 즐기고, 맛있는 식사도 한 뒤 집으로 돌아가시나 보다. 그 모습이 참 부럽다. 항상 여행을 하다보면 젊은 커플보다 오히려 질리도록 함께 한 노부부의 여행이 더 부럽게 느껴진다. 어쩌면 살아갈 남은 날을 세며 아쉬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현재를 즐기고, 옆에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 아닐까? 여행하는 노부부에겐 그런 느낌이 자주 든다.

창밖을 바라보니 돈다바야시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대 평화 기념탑이 보였다. 다시봐도 참 신기한 모양이다. 누가보면 신기함을 넘어 흉칙하다고 뭐라고 할지도 모르는데 이런 조용한 도시에 아주 떡하니 솟아있다. 저 탑을 가까이에서 못 봤다는 점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적해 보이는 낡은 플랫폼을 바라보며 표를 끊었다. 오사카로 갈 예정이었다면 킨테츠 미나미오사카선을 타면 되지만 난 사카이시를 가기로 했기 때문에 전날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된다.


갈아타야 할 가와치나가노역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전철의 내부는 매우 한적했다. 하긴 토요일이니 조금 여유로울 수 있는 것 같고, 게다가 여기가 오사카의 중심부도 아니니까 이런 한적한 전철의 분위기가 더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보다 예전부터 일본을 여행하면서 느끼긴 했는데 참 작은 도시까지도 거미줄처럼 연결된 전철이 참 신기했다.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일본의 가옥 풍경이 참 좋아 보인다. 높게 솟아오른 개성없는 아파트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나라에 비해 비싼 교통비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이렇게 먼거리를 전철을 타고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은 여행자에겐 큰 재미가 있다. 꼭 JR을 타고 먼 도시를 가지 않더라도 전철로 여러 소규모 마을을 돌아다닐 수도 있고, 창밖을 통해 주변의 풍경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철 내부의 창 너머에는 전차를 운행하는 승무원의 모습이 보인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전철에서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풍경이 아닌가 싶다.


가와치나가노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난카이 고야선을 타기 위해 표를 끊었는데 참 쉽게 적응되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오사카에서는 각 전철마다 운행하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환승 시스템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전철 노선표만 빤히 바라보며 해석하는가 하면, 그냥 역무원에게 가고 싶은 곳을 물어본 적이 많았다.

'가만있자. 내가 가려는 곳은 얼마를 내야하지?'


표를 끊고 3번 플랫폼 앞에서 전철을 기다렸다. 잠시 주변을 살피는데 내 앞에는 기모노를 입고 있던 할머니가 눈에 띠었다. 평소에 보던 화려한 기모노와는 달리 무척 단아해 보였는데 아무래도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모습조차도 신기하게 쳐다봤던 것 같다. 잠시 후 내가 타고 갈 난바행 전철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오사카 중심부로 들어가는 전철이라 그런 것인지 이번에 탔던 전철은 사람이 꽤 많았다. 덕분에 여유있게 앉아서 갔던 지난 번과는 다르게 사람들 틈에서 서있어야 했다. 역시 일본 사람들도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지 이어폰을 꼽은 채로 졸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일상을 구경하고 있는 셈이지만 여행을 하고 있으니 이런 모습도 재미있게 다가오는가 보다.


머리 위에 있는 전철 노선표를 봤다. 첫째 날에는 해석하기 정말 힘들었던 노선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똑같은 노선이라고 하더라도 정차하느냐에 따라서 로컬(Local), 세미 익스프레스(Semi Express), 서브 익스프레스(Sub Express), 익스프레스(Express)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만약 로컬을 타게 된다면 가장 느리게 가는데 그건 모든 역에 다 정차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서야 오사카 부의 전철 노선을 이해하게 되었다며 조금 좋아했다.


나는 전날에도 잠깐 거쳐갔던 텐가차야에서 내렸다. 다른 전차를 타려고 가려는데 난카이 고야선로에 전차가 들어왔다. 생김새가 다른 전차의 모습을 보는 것도 승무원이 나와 밖의 상황을 살피는 모습도 나에겐 흥미로웠다. 전차를 타고 이동하는 거리는 결코 짧지 않았지만 이런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항쪽으로 가는 전차로 갈아타고 다시 이동했다. 오사카 전철이 복잡하기는 했지만 이제 익숙해졌다는 생각에 크게 여유를 가진 상태였다. 때문에 다시 한가로운 전철을 풍경을 둘러보니 내 왼쪽에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짧은 머리의 남자가 만화책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오른쪽에는 아주 똘망똘망하게 생긴 꼬마 아이가 혼자 어디를 가는지 손에 쥔 종이 쪽지를 들고 있었다. 혹시 할머니댁에 혼자 가고 있나?

맞은편의 할아버지는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고, 그 바로 옆에는 세 명의 할머니들이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저 멀리에는 세련되게 옷을 입은 여자가 있었는데 자리가 있는데도 이어폰을 꼽은 채로 굳이 서있었다. 일부러 주변을 살폈던 것은 아닌데도 이동하는 내내 그들의 일상이 흩어졌던 기억의 조각처럼 눈에 들어왔다.

아뿔사! 그런 멋진 생각은 나에게 1초도 허락되지 않나 보다. 정차하는 역의 안내 방송을 듣던 도중 나는 깜짝 놀라 노선표 앞으로 달려갔다. 그랬다. 전차는 내가 가려는 방향과 점점 더 멀리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난 바로 다음 역에서 내렸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상당히 조용해 보이는 시외 어딘가에서 내린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내가 어딜 헤매지 않고 한 번에 간다는 게 어쩌면 더 이상했다. 오사카 전철은 이제 완벽히 이해했다고 오산한 순간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침착하게도 난 반대편으로 가서 되돌아 가기로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그럴수도 있는 거지.


자판기에서 알록달록한 색상의 여러 음료가 나를 유혹했다. 결국 머리도 식힐겸 갈증도 해소할겸 비타민 음료를 하나를 뽑아 마셨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미야자키를 여행할 때도 이런 비타민 음료를 마셨던 기억이 났다. 그날은 내가 버스 시간표를 맞추지 못해 히치하이크를 했었는데 아무튼 그때를 생각하니 비타민 음료가 나에게 여행의 기운을 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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