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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그것도 아주 늦은 밤, 필리핀에 도착했는데 만 하루가 지나지 않은 채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이제는 정말 한국으로 가는 귀국길이었다. 발리에서부터 싱가폴, 그리고 메트로 마닐라까지 이동하는 것도 여행이라면 여행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귀국길에 잠시 들리는 여정에 더 가까웠다.

아무튼 귀국길이라도 마닐라를 떠나기 전에 아주 잠깐이라도 시내를 돌아봤다. 필리핀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마닐라는 처음이었기에 도시를 걸어보는 행위는 필수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지난밤의 어두컴컴한 분위기가 마닐라의 전부가 아님을 믿고 싶었다.

아침은 로빈슨몰 바로 옆에 있던 식당에서 해결했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로빈슨몰도 열지 않아서 그냥 아무데나 갔던 것인데 가격이 꽤 비쌌다. 그리 고급 식당처럼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봉사료(Service Charge)가 붙었다. 확실히 필리핀은 배낭여행하기엔 결코 저렴한 나라는 아니다.

아침을 먹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걸었다. 목표는 이름도 생소한 인트라무로스(Intramuros)였다. 지도 한 장도 없던 내가 인트라무로스를 찾아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로빈슨몰에서 나와 같은 방향으로 계속 걷기만 하면 됐다.


낮에 바라본 마닐라는 지난밤에 비해 분위기가 훨씬 밝았다. 물론, 구걸하는 아이들은 여전히 보였지만 도시의 모습은 세부(Cebu)보다 높은 건물로 가득했고, 도로에는 차량이 뒤엉켜 사뭇 대도시의 모습이 드러났던 것이다. 조금 경계하던 마음을 풀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그때부터다. 여기도 내가 다녔던 어느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날씨는 역시 더웠다. 매연도 심했다. 하지만 필리핀답게 하늘은 무척 파랬다. 뭐가 필리핀답다는 것인지 나조차 알 수 없지만 파란 하늘아래에서 걷는 기분만큼은 무척 좋았다.


세부도 그랬지만 마닐라도 서민들의 대중교통은 지프니다. 세부는 도로가 좁아서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마닐라에도 여전히 지프니가 다니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여행자에게는 저렴한 교통수단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아무래도 지프니 노선을 모르면 처음에는 타기 힘들다. 그럼에도 난 인트라무로스까지는 걸어갔다가 나중에 돌아올 때 마닐라의 지프니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걸었다. 누구인지도 모를 동상이 있는 공원도 보였다. 호세 리잘인가? 평소라면 공원도 한 번 둘러볼 법도 한데 시간이 없으니 그냥 지나쳤다. 이미 난 빌딩숲을 벗어난 상태였다.


그러다 발견한 오래된 건물. 처음에는 이게 인트라무로스인가 싶어서 들어 가봤다. 그런데 인트라무로스는 아니었고, 안에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고 해서 그냥 뒤돌아섰다.


드디어 인트라무로스 입구가 나왔다. 오래된 성벽, 그리고 서양식 건물이 눈에 띈다. 인트라무로스에서 서양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과거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 세운 그들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트라무로스를 여행한다는 것은 과거 스페인의 도시를 돌아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골목길을 걸었다. 그때 어떤 아저씨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 나 좀 찍어보는 게 어때?”


필리핀에서는 사진이 갖는 힘이 무척 크다. 대게 필리핀 사람들은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말이다. 손은 가위를 모양을 한 채로 턱에다 가져가는 게 필리피노 포즈인데 여기에 미소를 한가득 지으며 사진 찍힐 준비를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런데도 어찌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있을까?


인트라무로스에는 오래된 건물, 오래된 성당이 보였다. 그리고 좁은 골목길에는 자동차와 마차가 다닌다. 사실 이곳은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게 훨씬 어색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