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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에도 삐끼가 달라붙었다. 보기에도 빈약해 보이는 개조한 자전거를 보이며 가이드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인트라무로스 구석구석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이제 돌아가는 길이라 가이드는 필요 없었다. 그런데도 삐끼는 끈질기게도 지도를 펼치며 쫓아왔다. 여태까지 여행을 하면서 이런 가이드를 받아 본 적도 없다. 그냥 더워도 걷는 게 편하지 이런 자전거를 타면서 여행하고 싶지 않다.

난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을 해도 끈질기던 삐끼는 한참을 따라오더니 겨우 갔다. 이제 인트라무로스를 빠져 나가 게스트하우스가 있던 말라떼 거리로 가면 되는데 지프니를 어디서 타야할지 몰랐다. 걱정할 거 없다. 그럴 땐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서 가면 되니깐.

멋스럽게 보이던 건물의 가드로 보이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지프니 타는 곳을 물어봤다. 친절하게 알려 준 아저씨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후 돌아서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의 의상이 눈에 띄었다. 과거 스페인의 도시 인트라무로스에 있어서 그런지 서양식 제복을 입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나의 물음에 아주 흔쾌히 응했다. 역시 필리피노는 사진 찍는 것을 거부 할 리가 없다.


몇 장 찍어서 보여주니 아저씨는 아주 흡족해 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더니 곧바로 사진을 갖고 싶다고 했다. 난 한국에 돌아가서 보내 줄 테니 이메일을 알려달라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이메일 주소가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내 이메일 주소만 적어주고 왔다.

이 아저씨와 즐겁게 인사를 나누고서야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필리핀이 기억났다. 필리핀의 이미지가 결코 어두컴컴하고, 음흉하지만 않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어느 누구보다 정이 많은 사람이 가득한 곳이 필리핀이다. 물론, 이는 도시보다 시골에 해당한다.


어느덧 인트라무로스 입구에 도착했다. 인트라무로스 구석구석 살펴보지 못한 점은 무척 아쉽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돌아가야 했다. 이제 지프니를 어디서 타야하는지 찾기 시작했다.


지프니 타는 곳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인트라무로스 입구 쪽에 있다고 했는데 확실히 버스 정류장처럼 보이는 곳이 있었고, 그곳에는 지프니가 수시로 멈춰서고 있었다. 이제 가는 방향의 지프니만 타면 된다.

그래서 옆에 있던 아주머니께 말라떼 거리의 다이아몬드 호텔 쪽을 가고 싶은데 어떤 지프니를 타야하느냐고 물어봤다. 아주머니는 잘 모르는지 옆에 있던 학생에게 내 질문을 전달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몇 명의 무리는 내 의도를 파악하고,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내가 탈 지프니가 보이자 손가락으로 가리켜 알려줬다.


어린 친구들 덕분에 지프니를 아주 쉽게 탈 수 있었다. 나는 지프니를 탈 때마다 늘 앞자리를 선호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나만의 넓직한 공간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이 많아지면 앞자리만큼 시원한 곳도 없다. 아무튼 난 조수석에 앉은 뒤 곧바로 지프니 기사에게 돈을 건넸다.

지프니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요금 시스템도 여전했다. 뒷좌석에 있는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돈을 건네면 다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건네진다. 결국 그 돈은 돌고 돌아 앞에 있는 기사에게까지 전해지는데 아저씨는 잔돈을 계산해 다시 승차했던 사람에게 돈을 건넨다. 난 옆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아저씨에게 주면 끝이었지만 지프니 요금을 내는 장면은 언제봐도 재미있는 풍경이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마닐라였지만 슬슬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지프니를 타고 달리면서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익혔다.


바로 앞에 지나다니는 지프니 행렬도 재미있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구경하다가 순간 주변 환경이 많이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내가 내려야 할 지점이었다! 깜짝 놀라서 아저씨에게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이럴 때는 아무데서나 내릴 수 있는 지프니라서 다행이다. 지프니에서 내리고 보니 딱 게스트하우스가 보였다. 아주 정확하게 내렸다.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와 짐을 챙기고, 느긋하게 앉아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그리고는 택시를 타고 마닐라 공항 터미널3으로 향했다. 시간은 아주 많이 남았지만 그렇다고 어정쩡하게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일찍 공항에 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체크인을 마쳤다. 이제서야 최종 목적지인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필리핀 페소를 다 사용하기 위해 약간의 쇼핑을 했다. 그래봐야 별거는 아니고, 평소 내가 좋아하는 말린 망고를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샀다. 역시 먹는 게 남는 거다.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기내에서는 쫄쫄 굶어야 했다는 점이다. 저가항공이라 기내식이 따로 나오지 않았는데 수중에는 필리핀 페소는 커녕 한국 돈도 하나도 없었으니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그나마 옆에 계신 한국인 아저씨가 과자를 주셔서 간단하게나마 요기는 할 수 있었다.


짧게 머문 필리핀도 안녕! 그리 길지도 않은 인도네시아 여행 마침표를 싱가폴과 필리핀을 거친 후에야 찍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