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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를 할 당시 짤막한 형태로 틈틈이 올렸던 '실시간 여행기'를 마무리하지 못해 늦게나마 다시 올리려 합니다. 시간이 너무 지나버려 비록 '뒤늦은 여행기'가 되었지만 여행했던 순간을 기록으로 끝까지 남기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시리즈를 끝내야 밀린 다른 여행기를 작성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바뇨스를 떠나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Quito)로 향했다. 바뇨스에는 한국인 여행자로 가득했기에 키토로 향하는 버스에 나 말고 한국인 여행자가 3명 더 있었다는 건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아주 잠깐 대화를 이어가긴 했지만 키토에 도착한 후 바로 헤어졌다. 택시를 타고 가겠다는 무리와 달리 나는 버스를 택했기 때문이다. 택시는 20달러나 했지만 버스는 고작해야 0.25달러였다.

 

키토는 북쪽과 남쪽에 큰 버스터미널이 있다. 바뇨스에서 출발한 버스는 남쪽에 있는 터미널에서 내려다 줬는데 사람들 사이로 배낭을 메고 걸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어 겨우 마리스칼 수크레(Mariscal Sucre)로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일반 버스를 2개 연결한 큰 버스였지만 앉을자리는 없었다.

 

미리 알았던 숙소를 찾아가 체크인을 하고 밖으로 나와 점심을 먹었다. 빈약한 치킨 한 조각에 콩과 밥이 놓여 있을 뿐이었는데 4달러였다. 

 

키토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무려 2년 전 아르메니아에서 만났던 빈센트와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빈센트는 미국에서 차를 가지고 중미를 거쳐 남미로 내려오고 있었고, 마침내 나와 에콰도르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다. 나보다도 오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는 반가움을 더 격하게 표했던 빈센트는 곧바로 축배를 들자고 했다. 

 

그동안 어떤 여행을 했는지 각자의 모험담을 쏟아내느라 맥주 한 병을 해치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한국식 프라이드치킨을 파는 식당을 발견해 자연스레 2차를 시작했다. 맥주와 안주가 더 필요했던 우리에게 치킨은 딱이었다.

 

여행을 하다가 누군가를 다시 만난다는 건 정말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다. 

 

다음날 나는 고장 난 휴대폰을 고치러 사설 수리소를 방문했다. 생각보다 전문적인 곳인지 1시간 만에 말끔한 휴대폰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빈센트와 함께 키토를 돌아보기로 했다. 남미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구 시가지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늘이 흐려서인지 매연으로 가득해서인지 키토의 분위기는 그리 밝지 않았다. 

 

구 시가지로 가는 도중 보였던 보토 나시오날 대성당(Basílica del Voto Nacional)이 눈에 띄었다. 규모가 크고 중후한 멋이 있어 나름 키토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라 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성당 외벽에 악어나 재규어(?)와 같은 동물 석상이 있다. 

 

보토 나시오날 대성당 2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성당의 내부나 첨탑을 올라갈 수 있다. 꼭 가봐야 하는 곳 중 하나라고 하는데 그냥 내키지 않았다.

 

조금 더 걸어가니 키토의 구 시가지가 나타났다. 여행하다 만났던 동생이 키토에서 강도를 만나 칼로 위협도 당하고 가방도 뺏겼던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자연스레 가방 끈을 한 번 더 꼭 죄였다. 

 

플라사 그란데(Plaza Grande)는 구 시가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남미의 다른 도시에 비해 광장의 규모가 작아 보였다.

 

좀도둑이 많다는 게 사실인지 광장 주변에는 경찰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구 시가지는 시장처럼 번잡해 보이기만 했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프란시스코 성당 주변은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건물이 몰려 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빈센트와 나는 아무 곳이나 들어가 봤다. 

 

과거 에콰도르 원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조각들이 걸려 있어 흥미로웠다.

 

잠시 휴식을 취할 겸 근처 펍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가 봤다. 

 

몇 개월 간 남미를 여행하다 보니 이제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이런 거리가 익숙했다. 낡은 집 사이로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카페나 식당도 몇 군데 보였다. 

 

키토의 남쪽 언덕 위에는 천사상(Loma El Panecillo)이 있는데 유명한 관광지이자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빈민촌에 위치하고 있어서 걸어서 올라가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수 없이 들었다. 

 

실제로 보니 확연히 다른 동네 분위기가 느껴졌다. 여행을 하면서 지나고 보니 위험한 동네를 모르고 다녔던 적은 많은데 그렇다고 위험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가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물론 택시를 타고 오를 수 있지만 이날 키토의 날씨가 너무 안 좋았고 빈센트도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회색빛으로 물든 키토는 크게 감흥이 없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동행하니 그냥 즐거웠다. 우리의 수다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저녁에 나와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맥주를 마셨다. 고작해야 2잔 정도 마셨기에 취기가 올라온 것도 아닌데 우리는 동네 한복판에서 셀카를 찍으며 신이 났다. 이렇게 몇 년 만에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재회를 하면 가끔은 세계가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을 먹기 위해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터무니없이 비쌌다. 주변에 여행자를 위한 숙소가 꽤 많이 몰려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물가가 꽤 비쌌던 거 같다. 빈센트도 여기 너무 비싸다는 말을 계속하며 일부러 저렴한 곳까지 찾아가자고 했다. 다른 데서는 3달러로 충분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아침이 10달러가 넘었으니 비싸다는 말이 절로 나올만했다.

 

스페인어로 적도(Ecuador)라는 뜻인 '에콰도르'에 왔으니 적도 박물관에는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빈센트는 오후에 떠날 예정이라 적도 박물관을 다녀오면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며 미리 작별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에 만나 너무 반가웠지만 서로의 방향이 다르기에 헤어짐은 당연했다. 아쉬워하지 않았다. 또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겠지.

 

적도 박물관으로 가는 버스에서 엄청나게 익숙한 국방색 가방이 눈에 띄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인이었다.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니 예상대로 적도 박물관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잠깐의 동행자가 생겼다.

 

사실 난 잘 모르고 갔지만 적도 박물관은 두 군데가 있었다. 하나는 '세상의 중앙'이라고 불리는 미타델문도(Mitad del Mundo)로 여기에 기념탑과 적도선이 있다. 그런데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진짜 적도가 이곳이라고 믿고 있는 인디오 적도 박물관(Museo de Sitio Intiñan)이 더 유명하다.

 

입장료도 4달러로 저렴하고 볼거리도 더 많다고 해서 인디오 적도 박물관으로 갔다.

 

인디오 박물관이라 그런지 가이드가 나서서 과거 이 적도 부근에서 살았던 인디오들의 독특했던 생활상을 얘기해준다. 

 

가령 다른 부족의 적을 죽인 후 머리를 잘라 가지고 다녔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미라처럼 변한 그 머리를 볼 수 있다. 사람의 머리가 저렇게 작아질 수 있나 보다.

 

언뜻 보면 잔인해 보이기도 하고, 야만적이라 느껴질 수 있지만 그건 현재의 기준에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예나 지금이나 남미에서 식용으로 먹고 있는 기니피그(꾸이)가 있다. 실제 모습을 보니 너무 귀엽다. 이런 귀여운 친구들이 남미에서는 별미로 식탁에 오른다니.

 

부족들이 실제 사용했다고 여겨지는 물건들이다.

 

인디오 관련 조형물이 곳곳에 배치돼 있지만 최근에 만들어진 것 같다.

 

인디오들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적도 체험이 이어졌다. 

 

적도에 있기 때문에 1년 내내 해시계의 그림자의 방향이 똑같다고 한다.

 

너무나도 유명한 적도를 기준으로 싱크대의 물 회오리 방향을 관찰했다. 그러니까 적도에서는 물이 그대로 빠진다는 것이고 남쪽에서는 시계 방향, 북쪽에서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물 회오리를 치며 빠진다는 논리다. 오래전에 싱크대의 물이 빠지는 방향은 적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글을 봐서 그런지 시작부터 어설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기했던 실험 중 하나로 적도에서는 쉽게 할 수 있다는 계란 세우기였다. 여기서 계란을 잘 세우면 일종의 인증서 같은 것을 주는데 난 아무리 시도해도 세울 수 없었다. 근데 상식적으로 적도가 아니더라도 계란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이게 적도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눈감고 적도선을 똑바로 걸어보라고 한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균형을 잃으며 빨간 선을 벗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도 적도와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나중에 적도 실험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니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전부 적도와 관련이 없었다. 적도가 아닌 곳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지만 단지 자주 해보지 않는 실험일 뿐이다. 물 빠짐과 코리올리 효과(전항력)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빨간 선도 적도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찝찝하다는 생각보다는 임의로 그어진 적도 위에서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게 다행이랄까.

 

야마에게 먹이 주는 것도 언제나 재밌다. 

 

미타델문도 박물관도 그리 멀지 않으니 가봤다. 그런데 굳이 들어갈 필요도 없어 보였고 멀리서 보였던 적도탑이 전부였다. 에콰도르에서 적도 체험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잠깐 동행했던 한국인 역시 같은 동네에 있는 숙소에서 묵고 있어서 버스를 타고 같이 돌아와 근처 중국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도 특별한 계획이 없다고 하니 이따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아침부터 열심히 걸어 다녀 너무 피곤했던지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했다. 저녁시간에 일어나 한국인 여행자에게 연락을 해봤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몇 시간 기다리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저녁을 먹으러 나갔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베네수엘라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이 지나고 난 후 한국인으로부터 연락이 오긴 왔는데 뭔가 씁쓸했다. 깊게 잠이 들었다고, 그리고 저녁을 먹었다니 다행이라고 했다. 그럴 수 있다. 근데 연락을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온 것도 아니고, 지금이라도 만나자는 말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내가 생각하는 여행자의 마인드와는 너무도 달랐다. 오랜 경험상 여행지에서 짧은 만남도 길고 긴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맥주를 마시며 피식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