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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방콕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 사실 치앙마이 주변의 다른 도시인 빠이정도는 둘러보고 싶었는데 시간도 돈도 허락하지 않아서 가보질 못했다. 나는 정말 가난했던 여행자였다. 그냥 무작정 여행이 좋다고 떠나왔는데 미얀마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한꺼번에 7000밧 넘게 써버리고 나니 슬슬 걱정이었다. 미얀마로 날아가면 ATM이 없기 때문에 현금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내가 가지고 있었던 돈은 고작해야 500불 정도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겠지?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배낭을 챙겨들고 앞에서 픽업 차량을 기다렸다. 몸은 상당히 지친 상태로 내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지루하기까지 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미얀마 가이드북은 2권으로 하나는 100배 즐기기 시리즈였고, 다른 하나는 영문판 론리플래닛 동남아 슈스트링이었다. 영문판이었던 론리플래닛만 있어도 여행은 충분히 가능했지만, 아무래도 그 나라의 역사나 문화를 이해하는데는 한글 가이드북 만한 것은 없는것 같았다. 그래서 구입했는데 실제 가이드북으로써 역할은 좀 실망스러웠다. 단순히 가이드북이나 지도가 더 중요시된다면 론리플래닛이 훨씬 낫다.

책을 읽는 것도 지루해지고, 졸립기까지 하는데 차는 도무지 올 생각이 없었다. 원래 6시였는데 그 시각을 훌쩍 넘겼는데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미 주변은 어두워졌는데 좀 걱정이 되었다. 이거 방콕으로 못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원래 좀 늦을 수도 있다고 말을 하더니 잠시 뒤에는 자신도 좀 걱정이 되는지 전화를 하기도 했다.

픽업차량은 내가 지겨워진 것도 지칠 무렵인 6시 반이 넘어서야 도착했다. 내 배낭을 썽태우와 비슷한 차량에 올리고 나도 같이 올라탔다. 안에는 외국인 2명이 이미 타있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인사도 하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호주인 모자사이였던 2사람은 태국에도 무지 자주 왔었다고 한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어려보였던 이 호주사람한테 픽업차량 기다리다가 죽는줄 알았다니까 웃으면서 끄덕였다.

픽업차량은 잠시 뒤에 버스가 정차해 있는 편의점 옆의 공터에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탔는데 치앙마이로 올라올 때 만났던 삼촌과 조카 여행자를 다시 만났다. 삼촌분은 너무나 피곤하신지 주무시고 계셨다. 버스에 올라타서 주변을 보니 한국인들도 몇 명 보였다.


버스는 치앙마이를 빠져나갔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아시아 계열의 한 여자는 무언가 꾸물거리면서 꺼내더니 과자를 나에게 건네줬다. 같이 먹자는 뜻이었다. 몇개만 집어먹으면서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봤는데 필리핀인이라고 했다. 마닐라에서 살았다가 지금은 싱가폴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과 친해지는 내가 아는 것을 말하면서 관심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필리핀도 가보았고, 싱가폴도 가보았다고 꺼내면서 내가 기억하고 있던 필리핀어를 조금 해보았다.

"필리핀어도 조금 알아요. 쌀라맛(고맙습니다), 마할기타(사랑해요)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내가 필리핀어를 조금 안다는 사실에 무척 재미있어 했다. 필리핀은 7000개가 넘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언어나 문화도 지역마다 크게 차이가 있다. 따라서 내가 있었던 세부에서는 '세부아노'라는 언어를 쓰고, 마닐라지역에서는 '따갈로그'를 사용한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몇 개의 언어가 따갈로그일 수도 있고, 세부아노일 수도 있었다. 실제 생활에서는 둘 다 쓰기 마련인데 세부지역이라고 하더라도 TV에서는 따갈로그가 나오기 때문이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옆의 여자는 잠이 들었는데 나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계속 MP3를 들으며 창문을 바라보는게 전부였다. 자리는 너무 불편해서 몸을 계속 뒤척이고, 억지로 눈을 감아 보아도 잠은 전혀 오지 않아 헛수고였다. 분명 좋은 도로처럼 보이는데도 계속해서 덜컹거렸다. 이름 모를 시골 마을을 계속지나고 있었고, 밤 하늘은 적당한 갯수의 별들이 매달려 있었다.

4시간쯤 지나서 버스는 휴게소에 도착했다. 방콕에서 치앙마이에 올 때 멈춰섰던 똑같은 휴게소였다. 주무시고 계셔서 내가 버스에 올라탄지도 몰랐던 삼촌과 조카 여행자는 휴게소에서 날 보고 너무 반가워하셨다. 물 한병 사고 그 자리에서 계속 이야기를 했다. 버스는 이 곳에서 갈아타기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꽤 오랜시간이 지나서야 버스를 갈아탈 수 있었다. 이 버스는 냄새도 안 나고, 깨끗했지만 이전 버스보다 좁다는 단점이 있었다. 버스는 다시 늦은 새벽 시간에 방콕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문득 그렇게 떠나고 싶었던 여행이 크게 감흥이 없다는 것에 적잖아 놀랐다. 내가 이런 여행을 하기 위해 종강을 하자마자 떠났던 것인지 걱정과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잠이 들다가 눈을 떴는데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도로는 이제 더이상의 덜컹거림도 없었고, 차들도 버스 양 옆에 붙어서 달리고 있었다. 슬그머니 밝아진 거리 위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새하얗게 밝아진 세상이 보였다. 아직 6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점차 빼곡해지는 도로 위의 차들을 보며 방콕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익숙한 거리인 카오산로드에 버스는 도착했고, 여행자의 짐을 꺼내 다들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나는 삼촌과 조카 여행자와 헤어지고, 한인 게스트하우스였던 DDM으로 찾아갔다.


이 강아지는 여전하구나. 폴 게스트하우스와 DDM은 분위기가 상당히 많이 틀려서 이번엔 DDM으로 온 것이었는데 방이 가득 찼다. 잠시 기다리다가 그냥 다른 곳으로 갔다.

몸은 피곤하고 지친데 다른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다닌다는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폴 게스트하우스를 갈까 하다가 그것마저도 너무 멀다고 생각해서 그냥 가는 길에 보였던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갔다. 전형적으로 서양인들이 많이 몰려있는 그런 게스트하우스였다. 1층 로비에는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무척 많았다.

싱글이 250밧(당시 환율로 약 1만원)이었고 정말 별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체크인을 했다. 그냥 피곤하다는 생각에 누울 공간이 필요했다. 250밧을 내고, 보증금으로 500밧을 냈다. 그리고 공동욕실로 가서 씻은 뒤에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 이거 불면증이라도 걸린걸까? 강아지 낑낑대는 소리만 사방에서 들려왔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 사치라고 느껴질만한 250밧짜리의 방, 그러나 침대 하나와 천장에는 선풍기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침대를 제외하면 공간이 거의 없었던 홍콩의 청킹맨션과 비슷했다. 나같은 여행자에겐 사치스러운 방의 모습은 가장 좁고, 아무 것도 없었던 그런 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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