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도쿄는 복잡했다. 도쿄는 처음이라 헤매는 것은 어느 정도 각오했는데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철 노선표를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데다가 난 도쿄가 아닌 곧장 북쪽에 있는 닛코(日光, Nikko)로 가야했기에 일정이 빠듯해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아사쿠사까지는 공항에서 게이세이선(Keisei Line)을 타고 가니 한 번에 갈 수 있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50분쯤 달리니 멀리서 은빛 타워가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회색빛이 나던 스카이트리였다. 사실 이 타워의 이름이 뭔지 관심도 없었으나 다음역이 스카이트리인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아사쿠사역에서도 전철 노선도 앞에서 멈춰 섰다. 이런 지도를 보고 바로 알아보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다. 어디로 가야 할까? 다행히 개찰구 앞에는 안내원이 있었다. 닛코를 가고 싶다고 하니 일단 A5출구로 나가서 다른 아사쿠사역으로 가라고 한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이 역이 아니라 도부-닛코선이 있는 도부아사쿠사역으로 가야했다.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아사쿠사역 부근의 거리였다. 멀리서는 스카이트리와 아무리 봐도 맥주 거품으로 보이지 않는 조형물이 보였다. 일단 닛코로 가는 게 먼저였기에 서둘러 역으로 들어갔다.
닛코로 가는 특급열차는 무려 3시에 있었다. 거의 1시간 뒤에 출발하는 열차다. 게다가 편도 가격이 2200엔이 넘었다. 이러면 특급을 탈 이유가 전혀 없다. 외국인에게는 닛코 왕복 교통편과 닛코 버스 이용권을 포함하는 패스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곧장 도부 여행 서비스 센터로 달려갔다.
직원 중에 한국어가 가능한 분이 있었다. 아주 친절하게 알려줘서 이것저것 다 물어봤다. 일정이 빠듯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차피 쾌속(2시간 30분)을 타고 가나 특급(1시간 50분)을 타고 가나 닛코에 도착하면 저녁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일정은 모두 다음날 아침으로 미루고, 닛코 패스를 이용해 이동하기로 결심했다.
닛코 패스 중에는 올 닛코 패스(All Nikko Pass), 월드 헤리티지 패스(World Heritage Pass), 기누가와 테마파크 패스(Kinugawa Theme Park Pass)가 있었는데 이중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올 닛코 패스였다. 올 닛코 패스에는 닛코 열차 왕복권, 버스 이용권이 포함되어 있어 내 일정에서 가장 유용해 보였다. 가격은 4400엔이지만 유효기간이 4일인데다가 버스도 무제한으로 탈 수 있어 비싸게 느껴지진 않았다.
당장 오늘 어디서 잘지도 정하지 않은 상태지만 도부닛코역에 도착해서 뭐든 생각해 보자는 마음으로 패스권을 구입했다. 떠나기 전에 닛코 버스시간표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일정이 빠듯하다는 점과 호텔 예약을 하지 않았다는 말에 걱정하시긴 했지만 안내원이 워낙 꼼꼼하게 설명해 주셔서 그런지 든든했다.
열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약 30분 정도 남아있어 아사쿠사역을 나왔다. 바로 앞에는 아케이드 쇼핑거리가 있었다. 잠깐 구경이라도 할겸 걷다가 이내 입구 쪽에 있던 타코야끼 가게 앞으로 돌아갔다. 생각해보니 점심도 안 먹은 상태였던 것이다. 출출함에 6개짜리 타코야끼를 하나 주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먹음직스러운 타코야끼를 하나 입에 물었다. 전에 먹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오사카에서 먹었을 때는 약간 흐물흐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여기는 겉이 바삭했다. 뒤를 돌아 살펴보니 굽는 게 아니라 튀기고 있었다. 살짝 튀긴 타코야끼도 나름 괜찮긴 했지만 역시 본고장 오사카에서 먹었던 타코야끼를 따라갈 순 없었다.
2시 50분 쾌속열차를 타고 닛코로 이동했다. 닛코로 가는 열차는 나중에 분리가 되기 때문에 꼭 5번째나 6번째 칸에 타야한다. 나는 떫은맛이 나는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는데 점점 도심의 풍경이 멀어져갔다. 도쿄에 온지 얼마나 됐다고 도쿄를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닛코까지는 정말 멀었다. 바로 앞에는 나이를 지긋하게 잡수신 할아버지 한 분이 신문 보는데 열중하고 있었고, 다른 좌석에도 조용히 책을 보거나 졸고 있는지 눈을 감은 채 머리를 기댄 사람이 몇 명 있을 뿐이었다.
도부닛코역 주변은 한산했다.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 가게는 닫기 시작했고, 버스역 주변에는 사람이라곤 나 혼자뿐이었다. 역 주변에 호텔도 보이지 않아 버스를 타고 니시산도로 갔다. 버스도 거의 막차였는지 승객은 나 혼자였다.
잠시 후 니시산도에 도착했다. 휑했다. 그냥 도로였고, 주변에는 세븐일레븐이 하나 있었다. 솔직히 세븐일레븐이 있다는 것 자체가 더 신기했을 정도였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한적한 동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부터 숙소를 찾아 가야 하는데 미리 찍어둔 터틀 인 닛코를 가기로 했다.
세븐일레븐 다음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니 어두워서 주변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도 몇 개 없었다. 거리에 인기척이라곤 거의 없었다. 조금 걷다가 이런 곳에 과연 여관이 있을까 의심이 들 무렵 한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영어가 안 될 것을 알지만 그래도 터틀 인 닛코를 아냐고 여쭤봤다. 뭐라 말씀하시더니 내 가이드북에 적힌 글자를 보고, 이해하신 모양이다. 난 방향만 물을 생각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설명을 하다가 이내 운전대를 잡는 손짓을 했다. 차에 올라타라는 얘기였다.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한 뒤 차에 탔다.
터틀 인 닛코는 그리 멀지 않았다.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어느 나라 사람인지, 그리고 지금 공부하는 학생이냐고 묻기도 했다. 터틀 인 닛코에 도착했을 때는 터틀이 또 있다며(터틀이라는 이름을 가진 숙소가 한 군데 더 있다) 잠시 기다려 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아주 느릿느릿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먼저 들어가서는 터틀 인 닛코가 맞냐고 물어보고, 방이 있냐고 물어봤다. 친절한 마음이 그대로 묻어났다. 내가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하니 손사레를 쳤다. 마중이라도 나갈까 했는데 아예 출입문을 닫아 버렸다.
덕분에 난 터틀 인 닛코를 아주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방을 먼저 살펴 본 후 체크인을 했다. 내일 새벽에 곧장 떠날 예정이라고 하니 깜짝 놀란다. 정말 이래저래 바쁜 일정이긴 했다. 아주머니께 이것저것 물어보니 다음날 여행할 닛코 주변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근데 비수기라 그런지 투숙객은 별로 없나 보다.
니시산도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맥주라도 한 잔 할 수 있는 이자카야라도 있을까 나가봤지만 어두컴컴한 거리만 나를 반겼다. 그나마 문을 연 식당도 중국 음식점뿐이었다.
선택권이 없는 난 여기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맛은 그닥 없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목욕도 하고, 맥주도 마셨지만 뭘 해도 이른 시각이었다. 그나마 TV가 있어 다행이었지만 사실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일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려면 그냥 일찍 잠드는 게 조금 나으려나. 아무튼 여행 첫날, 조금은 허무한 여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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