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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선거를 통해 국민의 권력을 증명하고 있어 독재자를 인정하지도 않고, 인정할 수도 없는 구조다. 그러니 민주주의 국가에선 독재자를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의 독재자 호자와 구 유고슬라비아의 독재자 티토와는 비교할 수밖에 없다. 같은 독재자였지만 달라도 너무 달랐다.


티토 역시 정치적인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유고 연방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가 그의 생전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같은 공산주의였던 소련과는 다른 노선을 취해 대립각을 세웠으며, 놀랍게도 서방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각기 다른 6개의 나라(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마케도니아)가 하나의 강력한 연방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도 티토의 리더십 때문이었다.


실제로 티토가 죽자 유고 연방은 갈기갈기 찢어져 내전이 벌어졌다. 티토를 싫어하는 사람 역시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티토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은 이유도 바로 위에서 열거한 것들 때문이다. 당시 유고 연방은 독자적인 노선을 취했으나 상당히 강력한 국가였다. 현재 이 지역이 서방과 비교할 때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때 말이다.


반면 알바니아의 독재자 호자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다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자가 집권한 공산주의 시절을 알바니아의 암흑기라 생각한다. 그는 무려 40년간 권력을 쥐고 자신을 신격화했다. 티토는 소련이나 중국과 다른 차별화를 꾀했지만 호자는 중국과 친하게 지내면서 조금이라도 공산주의 노선에 수정을 가하면 비난을 하며 관계를 끊었다.


그러는 사이 점점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급기야 있지도 않는 적을 대비한다며 벙커 만들기를 지시한다. 지금도 수도 티라나를 비롯해 평화롭다 못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시골마을에서도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벙커가 남아있다. 알바니아조차 당시 벙커가 몇 개나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는데 적게는 30만, 많게는 80만까지 부른다. 이렇게 많은 벙커를 철거하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가난한 나라 알바니아에서 감당하기 힘든 비용 때문이다.


아마 알바니아 사람들에게는 독재자 호자의 동상이 무너졌던 날이 가장 기뻤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알바니아 사람들은 내가 중국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인 것을 알게 되면(꼭 남한인지 북한인지 물은 뒤) 이렇게 말한다.


"커뮤니스트 노, 수드 코레아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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