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비아 빈트후크(Windhoek)에서 버스를 탄지 21시간 만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Cape Town)에 도착했다. 과연 케이프타운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배낭을 메고 걸을 때면 커다란 빌딩과 넓은 도로가 눈을 돌아가게 만들었다.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일본인 여행자 유키는 숙소를 정하지 않아 내가 예약한 숙소로 따라왔다. 우리는 자연스레 며칠간 여행을 함께 하게 되었다.
케이프타운에 왔지만 대체 어디를 여행해야 하는지 모르던 나는 다음날부터 유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걷기 시작한지 몇 분만에 도착한 보캅(Bo-Kaap)이라는 동네였다. 보캅은 케이프타운 내 무슬림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알록달록한 집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보캅은 케이프타운을 여행하게 되면 꼭 들르게 되는 동네다. 케이프타운의 중심지인 롱 스트리트(Long Street)에서 불과 몇 블럭이면 갈 수 있으니 잠깐 시간을 내는 것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어느 나라를 가든지 이런 알록달록한 동네가 있는데도 항상 신나서 사진을 찍게 된다. 우리와 같은 관광객 몇 명도 사진 찍는데 여념이 없다.
동네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이곳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인데다가 상업적인 면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알록달록하다고 사진만 찍고 지나가기엔 큰 의미를 놓칠 수 있다. 보캅의 집들이 알록달록한 이유는 남아공 역사상 최악의 정책이자, 억압과 차별의 상징인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자 그들은 자유의 기쁨을 표현하고자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 등의 원색으로 집을 색칠했다고 한다.
남아공에서 5월은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였지만 다행인지 케이프타운은 그리 춥지 않았다. 물론 밤에는 조금 쌀쌀했지만 낮에는 항상 따스한 햇살 덕분에 걷기 무척 좋았다.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첫날부터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이라면 도시를 감싸고 있는 듯한 거대한 돌산, 테이블 마운틴이다. 그것도 평범한 산이 아닌 테이블처럼 정상이 평평한 독특한 형태의 산이다.
테이블 마운틴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지만 걸어서도 갈 수 있다. 튼튼한 다리가 있는데 케이블카가 웬 말이냐, 이런 마음으로 당연히 우리는 걷기를 선택했다. 얼마 가지 않아 땀으로 옷이 젖으니 케이블카를 괜히 돈 내고 타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오르다가 길을 찾지 못해 테이블 마운틴의 정상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평평하다는 테이블 마운틴의 정상이 궁금하긴 했지만 나와 유키는 우리 스스로도 놀랄 만큼 쉽게 포기한 후 이 정도 올라 경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했다.
우리는 그늘진 곳에서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역시 산을 오를 때는 한나절이지만 내려올 때는 순식간이다.
테이블 마운틴에서 내려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도중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뉴세븐원더스의 세계 7대 자연경관 안내판을 보게 되었다. 공무원에게 전화투표를 독려하고, 전화 요금으로 몇 백억을 내면서 우리나라 제주도가 선정되었다고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바로 그거다. 그러니까 테이블 마운틴 역시 세계 7대 자연경관에 선정되었다는 건데 애초에 공신력도, 실체도 없는 재단에게 휘둘린 것이라 오히려 나는 이 안내판을 보고 테이블 마운틴의 가치가 더 떨어진다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막에서 붉은 모래언덕만 보다가 케이프타운에서 빌딩숲을 보게 보니 정말 신기했다.
테이블 마운틴에서 내려와 우리는 V&A 워터프론트로 이동했다. 그런데 워터프론트는 코앞에 두고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워터프론트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던 것도 있지만 그저 바다를 보겠다는 마음으로 걸었던 것 같다.
주말이 된 케이프타운은 정말 평온했다. 강아지와 뛰노는 아이들, 공놀이를 하는 가족들이 풍경에 더해졌다.
우리도 잠깐이나마 주말을 즐기는 그들처럼 그린포인트 공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어찌된 일인지 많은 배낭여행자들은 케이프타운에 가면 스시를 먹었다고 자랑하는 인증 사진을 찍었다. 맨날 닭다리만 뜯다가 남들이 올린 스시 사진을 보며 군침을 흘리곤 했기에 케이프타운에 가면 근사한 스시를 먹을 수 있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건 유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첫날부터 나와 유키는 스시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결국 원하는 스시집을 찾지 못했다. 며칠 뒤 무한 스시로 유명한 액티브 스시(Active Sushi)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기대가 크긴 했나 보다. 1년 전에 올린 후기보다 가격은 엄청나게 올랐으며 무엇보다 기대했던 스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일본에서 멀고 먼 남아공에서 스시를 먹는다 하지만 주먹밥처럼 거대한 밥 위에 살짝 올려진 생선은 하나만 먹어도 배불렀다. 당연히 맛도 현지화되어 아보카도와 치즈가 들어간 종류가 많았다.
남아공이나 케이프타운을 모르는 사람도 희망봉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니 케이프타운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희망봉은 꼭 가봐야 하는 장소라고나 할까.
희망봉을 투어로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우리는 열차를 타고 직접 가보기로 했다.
열차 내부에는 낙서가 가득해 조금 칙칙했다. 게다가 흑인의 거주지를 강제로 이주시킨 아파르트헤이트의 잔재인지 열차가 케이프타운의 외곽으로 빠져나갈수록 흑인 비율도 점점 높아졌고, 역 주변에는 텐트를 치고 사는 사람도 보였다. 조금 더 달리자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목적지인 사이먼스 타운(Simons Town)에 도착하자마자 돌아가는 열차 시간부터 확인했다.
사이먼스 타운을 잠깐 걷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이제 막 도착했는데 다시 오고 싶을 만큼.
사실 우리는 사이먼스 타운에 예상보다 늦게 도착해 희망봉을 가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러나 그러는 것도 잠시 배가 고파 근처 식당에 앉았다. 부둣가에 정박한 배가 보이고, 그 앞에는 주로 해산물을 파는 식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바다가 보이는 이곳에서 맥주가 빠질 수 없다.
가장 싼 메뉴를 찾다 보니 역시 피쉬앤칩스 밖에 없었다. 어차피 점심이니 가볍게 허기만 때우자는 생각으로 피쉬앤칩스와 오징어튀김을 먹었다.
잠깐 동네를 걷다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희망봉은 보러 가야 하지 않겠냐며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다. 시내에는 당연히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관광안내센터도 문을 닫았고, 역 부근에서 봤던 호객꾼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역 부근으로 돌아가 희망봉으로 갈 수 있는 택시(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낡은 밴)와 적당히 협상을 하고 타게 되었다.
구불구불 산길을 지나 희망봉에 도착했다. 유쾌한 택시 기사는 주차장에서 꼼짝하지 않고 기다릴 테니 천천히 둘러보고 오라 했다.
희망봉을 여행하는 여행자는 케이프 반도 끝에 있는 언덕, 케이프포인트(Cape Point)를 오르게 된다. 근사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바다를 보며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이 아프리카 최남단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굴라스 곶이 최남단이다. 여기가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유럽인들이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을 뚫고 이곳만 지나면 파도가 잔잔해져 인도로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처음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인들은 거친 파도 때문에 ‘폭풍의 곶’이라고 불렀다. 또한 희망봉(Cape of Good Hope)이라는 말은 어디서부턴지 몰라도 번역이 잘못된 예다. 보통 반도보다 작은 단위 케이프(Cape)를 ‘곶’이라고 부르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곳은 ‘희망곶’이 아닌 ‘희망봉’으로 부르고 있다.
늦은 시각에 도착한 우리는 여기서 여유를 가질 틈은 없었다. 아쉽긴 해도 케이프포인트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곧장 내려왔다.
아프리카 최남단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출발해 남아공까지 비행기를 타지 않고(사실 레바논과 터키에서 페리를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탔던 한 구간이 있었지만) 여행했기에 감회가 남달랐다. 언젠가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했을 때 항상 내 마지막 종착지는 바로 이곳 남아공이었으니까.
케이프포인트에서 내려와 우리는 희망곶으로 향했다. 역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기에 고작 안내판 하나만 있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이 있어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이 없던 우리는 서둘러 사이먼스 타운으로 돌아왔고, 해가 지기 전에 펭귄이 있는 볼더스 비치(Boulders Beach)로 갔다.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펭귄이 눈앞에 있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다만 우리는 시간이 없어 역으로 돌아가야 했고, 펭귄을 충분히 보지 못한 아쉬움에 유키는 내일 다시 오자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자 거짓말처럼 우리 마음은 180도로 바뀌어 없던 일로 했다.
대신 아직 다 돌아보지 못한 케이프타운을 탐험하기로 했다.
워터프론트(V&A Waterfront)에 들어서자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분명 며칠 전에 이 근처를 걸었지만 워터프론트에 뭐가 있는지 짐작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커다란 백화점과 근사한 식당이 즐비한 케이프타운 대표 관광지였던 것이다.
무의식적으로라도 “여기는 아프리카가 아닌 것 같다”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하고,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아프리카는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척박하고, 굶주린 대륙은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어서는 안 되고, 또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적어도 내가 7개월 동안 여행한 아프리카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터프론트를 걷다 나도 모르게 “여기는 아프리카가 아닌 것 같다”라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만큼 분위기가 좋았다.
며칠간 함께 여행했던 유키는 레소토(Lesotho)로 떠났다. 나 역시 레소토를 가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남아공 여행은 2주면 충분할 줄 알고 항공편을 미리 예약했던 게 이렇게 후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예약을 변경하려고 메일을 보내봤다. 그런데 날짜를 변경하려면 140유로를 더 내야 한다는 말에 바로 접었다. 결제한 금액은 480유로였는데 140유로를 더 내면서까지 연장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케이프타운에서 어정쩡하게 시간을 보낸 후 다음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어디를 가면 좋을까 고민하다 해안을 따라 이동해 나이스나(Knysna)로 가기로 결정했다. 남아공은 다른 어떤 아프리카 국가보다 여행하기 쉬웠다. 버스는 인터넷으로 예약, 결제가 가능해 굳이 버스터미널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도 나는 인터케이프 버스를 예약했다.
밤에 롱 스트리트를 걷다 보면 괜찮아 보이는 펍이 많이 보인다. 그 중 한 군데였던 타이커 밀크(Tiger’s Milk) 입구에서 멈춰 섰을 때 호객을 하던 직원이 들어와서 맥주 한 잔 하라고 권했다. 혼자여서 망설였던 나는 안으로 들어가 바에 앉았다. 시끌벅적하지만 꽤 괜찮은 분위기의 맥주 전문점이었다. 다만 기대했던 것보다 맛은 그럭저럭 보통이었다. 그래도 바에 앉아 직원과 여러 얘기를 주고 받으며 맥주를 마시니 나름 재미있었다.
롱 스트리트에 어둠이 깔리자 숙소로 돌아가 8일간의 케이프타운 여행을 마칠 준비를 했다.
늦은 저녁을 먹는데 강아지가 빤히 쳐다본다. 그렇게 귀엽게 쳐다봐도 줄 수 없어.
나이스나로 가는 버스는 새벽 6시에 출발이라 5시부터 나갈 준비를 했다. 버스터미널이 케이프타운 역 주변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정확한 방향을 가늠할 수 없어 주변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봤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같이 역으로 들어가면서 역 뒤로 가면 버스가 있을 거라며 알려줬다. 그러나 내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두리 번 거리자 아저씨는 멀리서 다시 나에게 온 뒤 버스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줬다. 그러면서 자신은 도와주는 걸 무척 좋아한다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언제나 친절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고맙고, 즐거운 마음이 생긴다. 나이스나에는 오후 2시 경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이후 동양인 여행자가 나를 계속 쫓아왔는데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숙소를 예약했던 것이다. 그녀는 일본인이었고, 사키라고 했다. 남아공에서는 일본인 여행자를 자주 보는 것 같다. 그래 봐야 두 번째지만. 아무튼 우리는 숙소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조금 쉬다가 함께 워터프론트로 나갔다. 나이스나의 워터프론트는 당연히 케이프타운의 워터프론트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름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가게와 식당이 있었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 자리를 잡은 뒤 늦은 점심을 먹었다. 사키 역시 혼자 여행하고 있었는데 우선 남아공을 여행한 후 짐바브웨, 잠비아, 나미비아 등 주로 남아프리카 지역을 여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점심을 먹은 후 다리를 건너 데센 섬(Thesen Island)로 가봤다. 나야 아무 생각 없이 나이스나에 와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경치가 좋고, 그림책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집들이 해안에 자리잡고 있어 참 근사했다. 섬을 걷다 보니 굴 요리 전문점이 많이 보였다. 나이스나는 남아공에서 손꼽히는 굴 양식장이 있다고 한다.
나이스나에는 현지 맥주 브랜드인 미첼(Mitchell) 공장이 있다. 역시 사키를 통해 이런 맥주 공장이 있다는 것과, 견학은 물론 시음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맥주 공장의 규모는 작은 편이라 견학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우리 둘 다 맥주 시음만 하기로 결정했다.
총 7가지 맥주를 소량으로 시음한 뒤 1병의 맥주를 받는다. 다만 다양한 맛의 맥주를 시음할 수 있지만 다른 맥주에 비해 그리 맛이 좋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다음 목적지는 남아공 최대 도시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였다. 나이스나에서 헤어지기 직전 사키에게 내가 요하네스버그로 간다고 하니까 자신을 무서워서 절대로 가지 않을 거라 했다. 무리도 아니다. 사키가 가지고 있는 가이드북에는 요하네스버그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을 뿐만 아니라, 프리토리아(Pretoria) 역시 우범지대가 많다고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게 일본인들은 가이드북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편이다. 나 역시 아프리카에서 위험한 도시로 알려진 케냐의 나이로비나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을 여행했어도 요하네스버그만큼은 악명 높은 소문을 너무 들어 만약 남아공 여행을 하게 될 경우 무조건 피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깐.
가이드북에 있는 요하네스버그 항목을 읽어보면 특히 열차와 버스가 정차하는 파크스테이션은 꼭 피하라고 했는데 어찌 그럴 수 있나. 그런데 막상 파크스테이션에 도착하고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흑인 비율이 높을 뿐 이렇게 거대하고 깨끗한 곳일 줄 몰랐다. 난 왜 음침한 곳이라고 상상했던 것일까. 아무튼 너무 커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했는데 헤매는 나를 불러 도움을 주는 몇 사람을 만나 택시를 탈 수 있었다. 보통 요하네스버그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신도시 샌튼(Sandton)에 지낸다고 하는데 나는 멜빌(Melville)로 갔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요하네스버그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비행기를 타러 갔을 뿐이다. 위험한 도시로 알려진 요하네스버그에서 긴장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남아공을 여행하면서 요하네스버그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고, 즐거울 줄이야. 호스텔에 도착하자마자 난 이집트, 브라질, 뉴질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 여러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 함께 하게 되었다. 멕시코 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5대륙에서 모인 우리는 정말 신났다! 야간 버스를 타고 왔음에도 피곤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는 곧장 시내에 있는 칼튼 센터(Carlton Centre)로 갔다. 칼튼 센터는 높이 223m로 남아공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유명하다.
칼튼 센터의 50층으로 올라가면 탑 오브 아프리카(Top of Africa)라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치고는 조금 심심한 편이지만 360도 방향으로 요하네스버그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케이프타운도 마찬가지였지만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우버를 이용하면 택시보다 저렴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우리는 사람이 많아 나눠서 타게 되었고 나와 데이빗 그리고 칼로리네만 먼저 도착해 전망대를 구경했다. 한참이 지나 다른 친구들이 도착했다.
1973년 완공되어 무려 43년간 아프리카 최고층 빌딩 타이틀을 쥐고 있는 이 칼튼 센터도 현재 아프리카에서 지어지고 있는 여러 초빌딩으로 인해 조만간 기록이 깨질 예정이라고 한다.
칼튼 센터에서 내려온 우리는 파크스테이션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원래 3시 30분에 있는 요하네스버그 프리 워킹투어를 같이 할 생각이었으나 힘들게 뛰어온 보람도 없이 10분 늦게 도착했다. 보통 대부분의 워킹투어는 10분 정도 늦어도 가이드가 기다려주는 편인데 우리 외에는 워킹투어를 하려는 사람이 없어 조금 기다리다 갔다고 한다. 아쉽지만 우리는 발걸음을 돌렸다.
호스텔로 돌아가기 전에 시내 작은 펍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다 문득 과거 남아공에서는 인종차별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있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게 생각났다. 지금은 함께 앉아 맥주를 마시지만 갈등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을 텐데.
이 펍 앞에서는 여성과 관련된 어떤 행사를 하는지 화이트보드에 왜 자신이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지 적고, 입간판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남아공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는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다.
멜빌로 돌아온 후 수요일마다 열린다는 야시장을 찾아갔다. 처음에 야시장에 간다고 들었을 때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흔히 볼 수 있었던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흐릿한 불빛만 의지해 무언가를 파는 그런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내가 생각했던 ‘아프리카식 야시장’이 아닌 건물 내 공간에서 자리를 펴고 먹고 마실 수 있는 그야말로 세련된 야시장이라고나 할까. 조금 놀랐다.
기념품이나 옷을 팔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야시장이라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게 먹거리다. 독특한 점이라면 아프리카만이 아닌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기존에 봤던 야시장과는 다르지만 분위기에 흠뻑 취한 나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하나씩 살펴보며 뭘 먹어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카롤리네의 친구이자 같은 브라질인이었던 바네사와 그녀의 남자친구인 남아공인 크리스토를 만나기도 했다.
전부 맛있어 보여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한식이 보였다. 이런 곳에서 한식을 만나게 될 줄 몰라 그 앞에서 멈춰 서자 아주머니께서는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보셨다. 내가 한국인 여행자인 것을 알고는 이따 꼭 오라는 말씀을 하셨고, 잠시 후에 밥 먹으라며 불고기를 건네 주셨다. 그것도 공짜로. 돈을 내겠다고 해도 받지 않으셨다. 물론 그냥 주신 것도 감사했지만 한국인만의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그저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불고기를 받았고, 아주머니의 친구라고 하던 한 사람은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그냥 줬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공짜로 자꾸 뭘 받냐며 신기해했다.
단 하루였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고 어울려 지내다 보니 내일 요하네스버그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2주면 충분할 줄 알았던 남아공 여행이 부족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차라리 기대에 못 미쳤던 나미비아를 대충 마무리하고 남아공 여행을 제대로 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우리 옆자리에 앉았던 남아공인 시포와 므포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9시가 넘자 그들은 돌아가려 했는데 우리가 어딜 가냐며 붙잡았다.
멜빌 지역에는 늦은 시간에도 술을 마실 수 있는 괜찮은 곳이 많았다.
무슨 영문인지 남아공 친구가 내 술을 사줬다. 딱히 이유도 없었다. 친구니까. 혹은 내가 여행을 떠난지 600일이라서 사주는 거라고 돌려 말했다. 다른 친구들은 내가 공짜 술을 들고 오자 앞으로 옆에 붙어 있으면 공짜로 계속 얻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농담을 했다.
몇 시간 뒤 이집트인 모합은 제정신이 아닌 채로 길에 쓰러졌다.
요하네스버그를 떠나기 전 시간이 남아 네덜란드인 데이빗과 프리 워킹투어로 시내를 돌아봤다. 사실 난 6년 전에도 요하네스버그를 온 적이 있다. 당시 월드컵 경기를 보고 프리토리아를 비롯한 일부 지역을 관광했지만 단체로 움직이는 바람에 단 한 번도 자유롭게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배낭여행자에게는 그보다 답답한 여행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나중에 아프리카를 다시 오게 된다면 두 발로 돌아보고 더 많은 것을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외에도 영국인 부부가 프리 워킹투어를 참여하게 되어 가이드 포함 총 5명이 함께했다. 전날 칼튼 센터를 비롯해 파크스테이션 주변을 걷긴 했지만 정신 없이 돌아다닌 터라 설명을 들으면서 천천히 이동하는 워킹투어는 꽤 만족스러웠다.
분명 요하네스버그는 남아공 최대 도시라 높은 빌딩이 가득했지만 흉물처럼 비어있는 곳이 많았다. 가이드 말로는 많은 사람들이 샌튼으로 옮겨 간 것도 있고, 과거 흑인정부가 들어설 당시 백인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슬럼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웬만한 고층건물보다 훨씬 높은 빌딩에 사람이 전혀 없다니, 그것도 도시 한 가운데서 말이다.
관광지로 유명한 케이프타운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요하네스버그에는 확실히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요하네스버그가 대외적으로 안 좋은 이미지, 그러니까 위험하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가이드는 분명 예전에는 많이 위험했지만 지금은 점차 나아지고 있는 중이고, 관광객도 증가하고 있다 했다. 짧게 여행한 내가 요하네스버그에서의 안전을 장담하는 건 어리석지만,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다. 아무래도 미디어는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늦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내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남아공이 아프리카 내에서 번성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유럽인들의 골드러시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도 요하네스버그 내에는 금을 캐던 굴착기가 남아있다. 하지만 골드러시로 인해 몰려온 유럽인들은 원주민을 몰아낸 후 도시를 세우고,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게 된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남아공은 흑과 백이 철저하게 분리된 사회였다. 흑인은 백인이 거주하는 지역을 허가증 없이는 통행할 수도 없었고, 백인과 흑인이 이용하는 시설이 구분됐다. 가령 육교를 건너더라도 같은 통로로 이동할 수 없었다. 심지어 반투스탄(또는 홈랜드)이라 불리는 척박한 땅에 흑인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인종차별이 아닌 인종분리를 법제화 한 아파르트헤이트가 남아공에서 시행된 것이다.
뉴질랜드 친구 스티브가 렌터카로 공항으로 간다고 해서 숙소에서 미리 내 배낭을 넣고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워킹투어를 마치고 곧장 택시를 타고 박물관으로 향했다.
흑인을 백인과 완전히 분리시켜 오로지 백인만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던 법이 아파르트헤이트다. 어떻게 이런 정신 나간 법이 만들어졌는지 혹은 얼마나 정부가 악랄했는지 확인하려면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박물관으로 들어서는 입구부터 의미심장하다. 백인만 들어갈 수 있는 입구와 바로 옆에는 백인이 아닌 그러니까 컬러드나 흑인만 들어갈 수 있는 입구로 나뉘어져 있다. 동양인 중에는 간혹 ‘명예백인’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역시 백인과 구별돼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그래서 난 오른쪽 입구로 들어가봤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는 차별을 받고 있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 들어가면 백인 전용 입구로 연결되지 않아 스티브와 만나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 했다. 아마 서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만날 수 없는 이 철창은 당시 백인과 흑인이 완전히 분리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당시 사용한 신분증과 허가증이 붙어 있다. 한 흑인 여자의 신분증에는 흑인(Native)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분명 그녀는 남아공 사람이었지만 남아공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살아야 했을 것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당시 아파르트헤이트가 시행되는 과정과 백인들의 탄압, 그리고 흑인들의 해방투쟁이 사진과 영상으로 생생하게 전시되어있다. 정권과 공권력을 가지고 있던 백인 정부는 흑인들의 투쟁에 총으로 응답했다. 흑인들의 투표권은 박탈 된지 오래 전이었다. 게다가 반투스탄이라 불리는 흑인들을 위한 나라들을 멋대로 세우고 독립을 시켰다. 남아공 내에 있지만 다른 나라였으니 남아공에서 불법적인 매춘 사업이나 백인들을 위한 카지노가 들어서는 기형적인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한마디로 완전한 분리를 위해 혹은 노동력 착취를 더 쉽게 하기 위해 만든 나라다.
영화 <디스트릭트9>에서 나오는 외계인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던 흑인들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주도로 투쟁을 하게 된다. 백인 정부는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지도부는 종신형을 선고한다. 사실 이때부터 남아공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기 시작한다. 비정상적인 탄압과 인종 분리정책에 영국연방에서도, UN에서도 제명된다. 심지어 IOC에서도 회원 자격이 박탈돼 올림픽에 출전이 불가능해졌다.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 최초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1994년이 되어서야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됐다.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을 나와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 타지 않고 한국에서 남아공까지 1년 8개월간 여행했고, 나는 이제 집으로만 가면 되는데 그러지 않았다. 분명 아프리카가 지겹다 생각했고, 이제 여행은 충분하니 그리운 집밥을 먹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대로 여행을 끝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조차 갑작스럽게 찾아온 ‘여행자 정신’에 놀랐다. 게으른 여행자도 여행은 욕심이 생기나 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방랑병이 조금 오래 가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아르헨티나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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