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에 도착한 뒤에 곧바로 우리는 버스를 타고 요하네스버그로 이동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요하네스버그에서 조금 떨어진 소웨토라는 곳으로 향했다. 사실 아무런 이번 남아공 여정에 있어서 내가 준비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남아공에 대해서 전혀 알아보지도 않고 갔다. 그래서 그런지 소웨토라는 곳이 어디인지조차도 몰랐다.
공항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약간은 예상하긴 했지만 확실히 남아공은 영국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다. 시원하게 뻗은 도로하며, 영국식 영어는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의 지배를 받아오면서 나라의 모습은 서구의 형태와 매우 유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내가 가보았던 호주와 매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건물의 생김새가 비슷한 것은 물론이고, 빌딩 숲을 조금만 벗어나면 황량했던 호주의 아웃백을 보는듯 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도로 옆에 황폐해진 땅들은 전부 광산으로 금을 캐고 난 뒤에 내팽겨쳐진 것이라고 한다.
나의 남아공에 대한 첫느낌이라고 한다면 생각보다는 꽤 깨끗해 보였고, 괜찮아 보였다는 것이다.
약 18시간의 비행 끝에 날아온 남아공이라 다들 너무나 피곤했는지 달리는 버스 위에서 거의 다 졸고 있었다. 근데 나만 멀쩡했다. 물론 피곤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꽤 오랫동안 달린 끝에 나타난 요하네스버그의 도심이 나타났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요하네스버그가 아니라 그 옆의 소웨토였기 때문에 도시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지나쳐갔다.
역시 금을 캐던 곳으로 보이던 황폐해진 땅이 보였다.
예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가 하면 정말 콘크리트 벽이 그대로 드러난 집들이 모여 있는 곳도 있었다. 이러한 곳은 흑인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곳으로 백인은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남아공에서는 아직도 인종차별의 잔재가 심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바깥은 아침이고 춥다고는 하지만 많은 집들이 몰려 있는 것에 비해 사람은 거의 지나다니지 않았다. 이 곳은 철저하게 도시와는 격리된 느낌이었다. 무슨 수용소도 아니고 흑인들만 모여 산다니 남아공의 단면을 제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나는 보지 않았지만 영화 '디스트릭트 9'의 촬영 장소가 바로 소웨토라고 하는데 그 곳에서 나온 판자집은 많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군데 군데에서 볼 수 있었다. 정말 저 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일까?
남아공의 인종 차별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소웨토이다. 소웨토는 백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먹을 때 강제로 이주시킨 곳이다. 광산과도 가까웠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고, 분지의 형태라서 흑인들을 감시하기에도 편했다는 이유였다. 그런 소웨토에서 인종 차별 정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시위가 일어났고, 이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정부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인종 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헥터 피터슨이라는 꼬마 아이의 죽음이었다. 아이가 죽은 사진이 전 세계로 퍼지면서 남아공 백인들의 비인간적인 행태를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헥터 피터슨은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고, 현재는 헥터 피터슨의 박물관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박물관을 둘러 보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버스에 있다가 겨우 내렸는데 엄청난 추위에 울부짖어야 했다. 정말 너무 추웠다. 뼛속까지 파고들어오는 추위에 다들 몸을 움추리면서 고통의 신음을 내뱉을 정도였으니 남아공이 겨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고 있었다.
소웨토도 사실은 안전하지 않은 곳이라고 알려져 왔다. 물론 내가 겪은 것은 전혀 없기 때문에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방송국팀이 여기에서 도난을 당한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난 아직까지도 소웨토에 대한 평가는 보류 중이다. 내가 직접 겪은 여행이 아니라 단체로 이동하며 관광지만 둘러본 이번 여행은 남아공에 대한 모든 생각은 정말 단편적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소웨토도 분명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의 도난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고는 하지만 철창 너머에서 청소 일을 하시는 아주머니와 수줍어하는 아이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이들의 환한 미소가 거짓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남아공에서는 아직도 문제가 산적해 있다. 여전히 남아 있는 흑인과 백인의 엄청난 벽, 그리고 흑인과 혼혈의 벽, 심각한 범죄율, 어느 개도국보다도 심각한 빈부 격차 등은 남아공이 풀어야 할 문제들이었다. 비록 나는 남아공에서 며칠 지내다 왔지만 내가 보아왔던 사람들의 환한 미소처럼 남아공의 미래도 밝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헥터 피터슨 박물관으로 향했다. 헥터 피터슨 박물관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촬영은 할 수 없었다. 박물관은 크기에 비해서 많은 것들이 전시된 편은 아니었고, 인종 차별이 있었던 시대의 사진이나 영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백인들이 인종 차별을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 알 수 있었는데 이는 내가 갔었던 어떤 나라보다도 심했다. 애초에 남아공에 들어왔던 네덜란드계 사람들은 강력한 무기의 화력으로 흑인들을 지배했고, 그 이후에는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면서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먹었다.
소위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그들도 흑인들은 아예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마치 흑인들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던 당시의 권력자의 말을 영상에서 봤을 때는 정말 어처구니 없었다.
게다가 흑인들에게는 그들의 언어까지 말살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때와 다름이 없었다. 이에 학생들과 지식인층에서 강력하게 반발이 일어나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때 백인들의 진압 과정에 죽은 아이가 헥터 피터슨이었다. 이 아이의 모습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흑인의 인권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박물관 마지막 부분에 백인들도 깃발 등을 흔들면서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하는 사진들이었다. 그들이 남아공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취재를 나왔던 기자들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너무나 추웠던 한 겨울의 소웨토, 그곳은 슬픔과 아픔이 더욱 깊숙하게 느껴졌다. 아까 전에 보았던 주민의 미소와 함께 박물관에서 본 남아공의 아픔이 교차하던 순간이었다.
소웨토는 여전히 흑인들만 거주하는 빈민가이다. 지금은 이 빈민지역이 관광지역으로 되어 버려서 기반 시설도 어느 정도 갖춰지고, 헥터 피터슨 박물관이나 넬슨 만델라의 생가를 둘러볼 수 있지만 말이다.
위험하다고만 알려진 소웨토를 직접 보고 느끼니 정말 위험한 곳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고, 사실은 좀 더 둘러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여전히 빈민가라 강도 사건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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