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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이었지만 시티투어 버스도 타고, 머라이언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등 싱가폴에서 나름 만족스러운 여행을 마치고, 이제 공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사실 시간은 많이 남긴 했지만 딱히 할 것도 별로 없고, 조금 여유 있게 공항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에스플러네이드역으로 돌아가 MRT를 탔다.


MRT를 타고 창이공항으로 이동한 후 사용한 교통카드의 보증금을 환급받았다. 지금 서울의 지하철과 시스템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냥 보증금 환급 버튼을 누르고 카드를 넣으면 1S$의 보증금이 나온다. 근데 싱가폴을 떠나는데 돈을 환급받는 게 딱히 의미 있는 일인가 싶다. 물론, 돈인데 굳이 안 받을 이유도 없었다.


공항으로 돌아와서 곧바로 Left Baggage에서 맡긴 배낭을 찾았다. 커다란 배낭을 찾은 뒤 내가 할 일은 항공사 카운터로 이동해 체크인을 하는 것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필리핀 마닐라였다. 마닐라로 이동하는 항공편은 필리핀의 대표적인 저가항공 세부 퍼시픽이었는데 기존의 항공사와는 다르게 버젯 터미널을 이용해야 했다. 원래는 버젯 터미널의 존재를 몰랐지만 싱가폴에 도착했을 때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세부 퍼시픽은 버젯 터미널에서 타야 한다고 알려줬기 때문에 위치나 가는 방법을 알아 놓은 상태였다. 


창이공항 터미널2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니 어렵지 않게 셔틀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 있었다.


10분 정도 기다리니 셔틀버스가 도착했다. 이 버스를 타고 약 10분 정도 달리면 창이공항 버젯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다.


버젯 터미널의 분위기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LCCT와 무척 유사했다. 아무래도 저가항공을 위한 터미널이다 보니 기존 공항의 정돈 된 느낌보다는 다소 혼잡해 보이는, 흡사 시내 버스 터미널을 연상케 했다.


일단 세부 퍼시픽 카운터로 가서 체크인을 했다. 인도네시아 여행을 마치고, 싱가폴을 거쳐 이번에는 마닐라라니 돌아가는 여정이 참 복잡했다. 순전히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여러 저가항공을 타고 돌아다니긴 했지만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은 나름 좋았다. 아무튼 이번에는 마닐라다!

저가 항공이라고 뭐라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탈 항공편은 이번에도 지연됐다. 원래 이륙해야 할 시각에 탑승을 시작했으니 말 다했다. 그나마 몇 시간 이상 지연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까?


비가 쏟아져서 걱정했지만 비행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활주로를 달리더니 이내 하늘로 올라갔다. 이제 다시 지루한 이동이 시작되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내 옆에는 필리핀 남자가 앉았는데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아주 오래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인상에 비해 친절했다. 심지어 먹고 있던 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


지루한 이동이 끝나고, 드디어 필리핀의 수도 메트로 마닐라에 도착했다. 필리핀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마닐라는 처음이었다. 마닐라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어두워진 뒤라서 야경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아무튼 이제 마닐라 터미널3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일이 남았다.

공항 앞에서 대기하는 능글맞은 택시 기사를 뒤로 하고, 이제 막 공항으로 들어오는 택시를 타고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말라떼로 향했다. 빠르게 달리 택시 안에서 새롭게만 느껴지는 마닐라를 바라봤다. 필리핀의 최대 도시이자 수도답게 세부(Cebu)와는 다른 화려함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마닐라에 대해 잘 몰라도 벌써부터 반대쪽, 그러니까 이 도시의 어두운 단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예상은 적중했지만 처음에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게스트하우스를 빠져 나왔을 때 바라본 거리는 본래의 색을 잃은 노란 가로등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고, 그 거리의 어둠 속에서는 하얀 눈이 느껴졌다. 그 눈의 정체는 다름이 아니라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그것도 아주 어린 아이들이 헐벗은 채로 말이다.

앞서 말했지만 필리핀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분위기는 주변의 거대한 빌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빈민촌도 아니고 도시의 중심부에서 이런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필리핀의 빈부격차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편의점으로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는데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창문을 두드린다. 어린 아이였다. 제발 돈 좀 달라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하염없이 두드린다. 필리핀에는 어느 가게나 사설 경비를 고용해 입구을 지키고 있는데 편의점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경비는 이런 일이 아주 흔한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은 채 그 아이가 문 앞으로 오면 다른 곳으로 내쫓을 뿐이다.

마닐라는 거대하고, 현대적인 도시였지만 분위기만큼은 어두웠다. 아침이 되면 조금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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