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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이 ‘웨스턴 스타일’이라고 강조했던 화장실이었지만, 좌변기는 물을 부어야 내려가는 노동이 필요했고, 샤워기는 수도꼭지 끝에 매단 대충스러움을 자랑했다. 당연히 뜨거운 물이 아닌 차디찬 물이 나왔다. 그마저도 수압이 안 좋은지 물은 찔끔찔끔 나왔다. 하긴 5만 루피아를 주고 뜨거운 물을 기대하는 건 도둑놈 심보다. 그래도 가쁜 호흡을 내쉬며 샤워를 할 때면 뜨거운 물이 그립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햇볕이 너무 강해 아주머니는 가림막을 내려줬다. 아침은 오믈렛 토스트로 간단히 해결했다. 고작해야 식빵 2조각과 계란만 있을 뿐인데 1만 7천 루피아라는 가격은 비싸게 느껴졌다.

정글 트레킹을 출발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 마냥 기다리기만 했다. 내 뒤에는 나이가 어려 보이는 서양인 한 명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입이 근질거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트레킹을 다녀왔냐고 물어보니 오늘 간다고 했다. 오늘이라고 한다면 나와 함께 트레킹을 하는 멤버다. 반가운 마음에 서로 인사를 했다. 네덜란드인으로 이름은 닉이었는데, 나와 몇 마디 나누다가 대뜸 여태까지 여행을 하면서 한국 사람은 처음 본단다. 아무리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아도 그렇지 여태까지 단 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니.

잠시 후 트레킹 가이드가 도착했다. 쪼리만 신고 있는 날 위해 고무신을 줬다. 난 양말조차 없어 그냥 맨발에 고무신을 신었다. 그리고는 숙소에 짐을 맡긴 뒤 물을 샀다. 원래는 500ml만 사려고 했는데 아주머니가 1.5L가 필요할 거라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하긴 이틀 동안 정글에 있을 건데 500ml는 부족해 보여 1.5L로 바꿨다.

출발 전에는 다른 숙소로 이동해 네덜란드 여자 2명을 만났다. 한국인인 나와 같은 숙소에 머물렀던 네덜란드인 닉, 그리고 다른 숙소에 머물고 있는 네덜란드인 여자 2명, 이렇게 총 4명이 정글 트레킹 멤버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네덜란드 여자 2명은 오전 트레킹만 신청한 상태였다. 그리고 처음이나 나중에나 아시아인은 나 혼자였다.

숙소 앞에는 어깨까지 머리를 기른 남자 몇 명이 앉아있었는데 나를 보자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까 춤을 추면서 “오~ 꼬레아? 으히히, 그~앙남 스타일! 근데 너 오늘 정글로 가지? 그럼 오늘은 강남 스타일이 아니라, (말춤 포즈를 취하며) 바로 정글 스타일!”이라고 했다.

닉은 한국 사람을 안 만나봤어도 강남 스타일은 아는지 “그 노래 부른 가수 한국인 아니지?”라는 다소 황당한 질문을 했다. 아니 싸이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말은 대체 무슨 소리지?


정글 트레킹의 시작은 마을 뒤쪽을 걸으며 이동했다. 산을 오르기 직전에는 이곳이 오랑우탄 보호구역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출입 사무실을 지나쳤다. 출발은 산뜻했다. 초반에는 나무로 만든 계단도 있어,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물론 이건 트레킹 초반 이야기고, 나중에는 손을 짚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험난한 코스도 있다.


아직까지는 정글이라는 느낌보다는 마을 뒷산 분위기였다. 그들이 말하길 정글에서 많은 것을 얻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수액이다. 이렇게 나무의 껍질을 잘라내면 수액이 나오는데 이를 모아서 판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힘들게 모은 것치곤 상당히 낮은 가격에 팔린다고 했다.

부킷라왕 정글 트레킹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야생 오랑우탄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야생이라 오랑우탄이 항상 일정한 시각에, 일정한 장소에서 나오진 않지만, 동물원의 오랑우탄처럼 갇혀있는 게 아닌 정말 살아있는, 야생 그 자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숲속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오랑우탄은 보르네오 섬과 수마트라 섬에만 있는 동물로, 실제로 사람과 가장 가깝다고 한다. 다만, 전 세계적으로 개체수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어 멸종위기다.


그런데 생각보다 야생오랑우탄을 쉽게 만났다. 1시간 정도 산을 오르다가 오랑우탄이 있다는 말에 우리는 분주히 주변을 살폈다.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검은색의 무언가가 나무에 매달려 움직이는 게 보였다.


조용히 매달려 있던 오랑우탄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나무에 가려 쉽진 않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정글 트레킹이 막바지에는 조금 힘들었어도 할만 했던 것은 이렇게 휴식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음 오랑우탄을 만나러 이동했다. 몇 십분 걸으니 또 오랑우탄이 보였다. 멀리 있던 그 녀석을 부르기 위해 우리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흡사 오랑우탄 말을 하는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냈고, 그래도 안 오자 바나나를 꺼냈다. 여기는 오랑우탄 보호구역이라 가이드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오랑우탄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오랑우탄을 향해 5분가량 구애를 하니 슬금슬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덕분에 이번에는 좀 더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오랑우탄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처음이라 무척 신기했다. 오랑우탄은 팔이 다리보다 길어서 나무에 매달린 모습이 매우 특이했다. 멀리서 보면 어떤 게 팔인지 다린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우리를 쳐다보는 오랑우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여기에서 또 휴식을 취했는데 모기가 정말 많았다. 정글 투어에 대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내게 모기약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리에 계속 달라붙는 모기에 미칠 것 같았는데 네덜란드 여자인 핌이 바르는 모기약을 빌려줘서 바를 수 있었다. 부킷라왕 정글 트레킹을 한다면 모기약은 필수다.

다시 또 걸었다. 이제부터는 편안한 길이 아닌 경사가 있는 길이 나왔다. 역시 가장 앞서서 걷는 사람은 나와 닉이었고, 네덜란드 여자들은 몸집이 있어서 그런지 무척 힘들어 했다.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급경사가 나와 힘겹게 내려가니 작은 계곡이 나왔다. 물을 보자마자 전부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지 오래였다. 잠깐 쉬는 틈을 타서 물을 마시곤 했는데 나 역시도 생각보다 물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 1.5L 물을 사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난 여기에서 고무신을 벗고, 쪼리로 갈아 신었다. 양말이 없어 그냥 고무신을 신었더니 땀이 찼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그냥 쪼리를 신었는데 미끄럽긴 해도 땀이 차는 고무신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좁은 길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다른 무리의 트레킹 멤버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또 쉬었다. 산을 계속 오르내리긴 하지만 이렇게 쉬는 시간이 많았다. 이때 오전 트레킹만 신청했던 네덜란드 여자 2명은 내려가고, 처음 만난 새로운 무리와 함께 하게 되었다.


가이드가 들고 온 배낭에는 우리가 먹을 간식과 점심이 들어있었는데 당연히 엄청 무거웠다. 닉은 한 번 들어보고는 어떻게 이런 걸 들고 산을 오르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이들이 가져온 맛있는 과일은 소진한 체력을 보충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새로 합류한 트레킹 멤버와는 아직까지 인사를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아시아 여행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때 합류한 가이드 헨리가 무척 웃겼다. 힘든 곳을 오르면 다들 표정이 일그러지니까 “스마일, 자자~ 스마일~. 내가 뭐라고 했지? 스마~일.”이라고 말을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함께 '스마일'이라고 말하면서 웃을 수 있었다. 

과일을 먹으면서는 뼈있는 농담도 했다.

“평소 이렇게 웃을 기회도 없잖아. 다들 컴퓨터나 쳐다보며 멍하니 쳐다보기나 하고. 하지만 여긴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냥 웃어. 너희 나라로 돌아가면 이렇게 웃지도 못할 테니 여기서 많이 웃으라고.”


이제 7명으로 늘어난 우리는 다시 정글 깊숙이 들어갔다. 이번에 만난 친구들은 작은 원숭이였다. 먹이를 주던 것도 아닌데(이런 원숭이들은 사나워서 먹이를 주고 싶지도 않지만) 우리 주변에 원숭이 무리가 돌아다녔다.


싸우는 것인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기도 하고, 누워서 우리를 가만히 쳐다보기도 했다. 동물원이 아닌 곳에서 원숭이를 본 적은 많지만, 정글에서 만난 원숭이 무리가 참 신기했다. 원숭이 왕국에 우리가 들어온 느낌이랄까.


그리고 또 만난 오랑우탄. 이번에는 훨씬 생동감 있는 엄마 오랑우탄을 만났다. 엄마인지 어떻게 아냐면 새끼 오랑우탄이 엄마 품에 매달렸으니까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나무에 매달려 이동하는데 마치 타잔처럼 우리 앞에 등장했다. 정말 털 많은 사람 같았다.


오랑우탄은 우리 앞에서 매달려 있다가 다시 느릿느릿 움직였다. 땅으로는 내려오지 않았다. 가이드 헨리 말로는 오랑우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집을 만든다고 한다. 아마 이 엄마 오랑우탄은 오늘 머물 집을 만들기 위해 이동하는 것일 테다. 사람을 보았으니 좀 더 멀리, 그리고 더 높은 곳에서 집을 짓지 않을까. 우리는 축축해진 땀을 닦으며, 이제 오랑우탄이 없는 정글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