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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오랑우탄을 보고 나면 부킷라왕 정글 트레킹에서 이제 남은 건 계속 걷는 것뿐이다. 사실 출발부터 이정도 산은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선두에 섰지만,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 7명은 또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오르막길을 헥헥대며 다 올랐을 때 다행히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식당도 없는데 어떻게 점심을 먹나 걱정했는데, 간단했다.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의 배낭에는 도시락이라고 할 수 있는 나시고랭이 들어있었다. 도시락뿐만 아니라 과일 등 이것저것 들어있었으니 가이드의 배낭이 무거웠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우리는 땅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점심 식사를 기다렸다. 정글에서 먹는 나시고랭이라고 하더라도 나름 구색은 갖췄다. 볶음밥만 대충 주지 않고, 토마토도 썰어서 넣고, 계란도 넣어줬다. 나시고랭은 인도네시아식 볶음밥인데 보통 식당에서 먹으면 토마토나 오이 같은 야채도 있고, 과자도 꼭 들어있다.


정글에서는 정글 스타일로 밥을 먹어야 하는 법. 다들 나무뿌리에 앉아 손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맛은 정말 끝내줬다. 땀을 흘린 뒤에 먹는 밥이라서 그런지 입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다만 손으로 먹는 건 여전히 힘들다. 손으로 밥을 먹을 때는 오밀조밀 잘 모아서 입에 넣어야 하는데 밥풀이 달라붙어 생각보다 먹는 게 쉽지 않았다. 양이 정말 많아서 간신히 다 먹었는데 닉은 다른 사람이 남긴 밥을 보더니 자신이 먹겠다며 달라고 했다. 얘는 참 잘 먹는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이번엔 파인애플을 줬다. 디저트로는 딱이었지만, 파인애플 한 조각도 아니고 이렇게 많이 먹으니 배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쉬면서 얘기를 나누다가 다들 내 팔을 보더니 무슨 일이냐고 했다. 메단에서 오토바이 날치기를 당해 넘어졌다고 이야기 해주니 다들 깜짝 놀라며 괜찮냐고 물었다. 날치기를 당할 뻔했을 때는 기분이 정말 안 좋았으나 하루가 지나니 괜찮아진 모양이다. 다시 여행자로 돌아왔기 때문이랄까. 아무튼 내 이야기를 듣고, 메단을 아직 가지 않은 사람들은 은근 걱정하는 눈치를 보였다.


배를 채웠으니 우리는 다시 울창한 나무아래 좁은 길을 걸었다. 간혹 길이라고 보기 어려운 험한 지형을 마주 대해도 계속 걷는다. 다만 손을 짚은 채로 기어가는 네발 달린 짐승이 될 뿐이다. 처음에는 여유롭게 “나, 군대 다녀온 남자야”는 말을 했지만 나중에는 거의 악을 써가며 오르막길을 걸어야 했다.


가이드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만 더 걸으면 ‘와우뷰’에 도착한다고, 그곳에서 쉴 거라고 했다. ‘와우뷰’가 뭐냐고 물으니 정상에서 바라보는 멋진 경치에 “와우”를 외칠 수밖에 없어 ‘와우뷰’란다. 거의 다왔다는 그 말에 다시 힘을 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땀으로 범벅이 되고, 모기떼에 내 다리가 뜯겨 정신이 없을 무렵, 드디어 우리는 와우뷰에 도착했다. 다들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와우”라고 외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르막길 끝에는 산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탁 트인 공간이 있었다. 물론 나무만 가득한 경치가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라면 좀 다르다. 빌딩숲이나 온갖 네온사인으로 밝혀진 야경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즐기려고 정글에 온 사람들이 아닌가.


와우뷰에서 쉬는 동안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때는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프랑스인 2명, 네덜란드인 2명, 스페인인 1명, 영국인 1명, 그리고 한국인이었던 나까지 총 7명이 이틀간 함께 했던 정글 트레킹 멤버다.

잠시 쉬다가 다시 걸었다. 이제는 정말 내리막길만 나오는 막바지였다.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지만 꽤 많은 시간을 걸어서 내려갔을 무렵,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이다!

“웰 컴 투 파라다이스!”


정말 여긴 천국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린 가방을 내팽개치고 물로 들어갔다. 시원한 물로 온몸을 적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물이 있고, 거기다 우리만 있는(사실 저 멀리에 다른 트레킹 멤버들이 있다), 그야말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는 ‘정글 스타일’로 말이다.


물에 들어갔다 나오니 따끈한 커피를 갖다 줬다. 설탕을 가득 넣어 달짝지근한 커피가 정말 맛있었다.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몸을 적신 후 우리는 돌무더기에 앉아 한참을 얘기했다. 신기했던 것은 네덜란드인 닉과 시모네가 무려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물론 두 친구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니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게 당연하지만, 은연중에 서양인들은 영어를 웬만큼 하지 않겠냐는 고정관념이 박혀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이 둘이 영어를 아주 못하던 것도 아니었다. 물론 영어 공부의 절실함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나였다는 슬픈 사실.


이런 머리 아픈 이야기가 오고가기도 했지만 정말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붕 뜬 기분이랄까. 물이 흐르는 소리가 시끄러워도 이 낙원을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평온함이 있었다. 비로소 휴가를 왔구나!


날이 서서히 어두워질 무렵, 원숭이들이 무리 지어 이동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수십 마리도 아니고 백 마리가 넘는 원숭이가 절벽을 따라 이동하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원숭이 무리가 다 지나갔을 때 딱 한 마리의 원숭이만 남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마도 그 원숭이는 길을 잃었나 보다.


저녁 식사는 옆에서 직접 만든 인도네시아 음식이었다. 여러 가지 반찬이 있어 나에게는 친숙할지도 모를 저녁이었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막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 캠프파이어를 준비했다. 원래는 밖에서 불을 피워 놓고 놀면 되는데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가이드 헨리의 준비된 카드 마술을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어쩐지 익숙한 광경이다. 예전에 태국 트레킹을 갔을 때도 가이드가 어쭙잖은 카드 마술을 보여주며 밤을 지새웠는데 여기도 똑같다. 다만 헨리의 카드 마술이 조금 더 훌륭했다. 카드 마술을 보던 닉은 난생 처음 보는지 무척 신기해했다.


카드 마술이 질린다 싶으면 우리에게 퀴즈를 냈다. 어렸을 때 다 한 번쯤을 해봤던 머리 쓰는 퀴즈 있지 않는가. 성냥개비를 2개만 옮겨서 계산식을 맞춘다든지. 간단하지만 절대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은 그런 퀴즈를 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초등학교 때 탐구생활 좀 열심히 할 걸.


잠시 후 비가 그쳐서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여기에서도 카드 마술은 계속 이어졌고, 간간히 게임도 했다. 정글에서 맥주도 마실 수 있었지만, 평소보다 2배나 비싼 5만 루피아였다. 헨리는 하류에서부터 맥주를 가지고 오느라 무척 힘들다면서 비쌀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다소 비싼 감이 없지 않지만 기분이다 싶어서 다들 맥주 한 병씩은 마셨던 것 같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우리는 모닥불 옆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이상한 단어를 따라 외치며 게임을 했다. 근데 내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너무 졸렸다.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아니면 트레킹 했던 피로가 몰려와서 그런지 아무리 버텨보려고 해도 참기 어려웠다. 아마 그렇게 졸린 상태로 2시간 이상 버텼을 거다.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먼저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날, 시끄러운 물소리에 잠이 깼다. 밤새 비가 와서 계곡물이 불어, 바로 옆까지 왔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워 주변을 살펴보니 내 옆에서 쓰러져 자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누웠다가, 한참 뒤에 일어나도 같은 광경이었다.

우리가 잠을 자는 곳은 무려 나무로 만들어진 임시 거처였다. 당연히 집의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그냥 비를 피할 수 있는 천막 수준이다. 남녀구별도 없이 그냥 잠을 잤다. 오랑우탄이 있는 정글에서의 하룻밤이라고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거야 말로 진짜 노숙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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