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이 어딘지 지나가던 사람에게 묻고, 기차를 타기 위해 승무원에게 물었다. 저 멀리 손으로 가리키는 다음 차로 이동한 후 또 물었다. 다음 차에서도 또 물었다. 1호차에서도 또 물었다. 내 자리가 43이 맞냐고. 그렇게 묻고, 또 묻는 게 일상이고, 그게 바로 여행이다. 그래, 나는 여행 중이다.
러시아에서 두 번째 장거리 열차에 올라탔다. 처음이 아니라 그런지, 아니면 7일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은 없다. 아주 자연스럽게 라면을 꺼내 먹고, 잠자리를 정리하고, 그리고 누웠다.
애초에 서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긴 했지만, 너무 잠잠하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춥다. 자다가 너무 추워 어제 벗어 놓은 양말을 다시 신었다. 추운 날씨만큼이나 낯선 공간의 추위가 느껴졌다. 처음에는 분명 그랬다.
그저 창밖의 시베리아와는 다른 황량함을 바라보고,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음악을 듣는 건 평소에 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천천히 이동하는 열차, 손님이 반만 채워진 열차의 어색한 분위기를 깨버린 건(물론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겠지만) 빨간 옷을 입은 꼬마 아이였다. 인형과 대화를 하는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버렸다. 커다란 눈과 길쭉한 눈썹, 귀여운 목소리가 모든 승객을 사로잡았다.
그런 분위기가 전해졌는지 내 옆자리에 있던 할머니는 알 수 없는 말과 미소를 전하고, 2층에 있던 남자는 사진을 찍어보라 했다. 심지어 승무원까지 내 자리에 앉아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후 이 공간은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겐.
#1
이름도 모를 어느 역에서 내려 바람을 쐬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여행 중이냐고. 그래, 당연히 여행 중이지. 딱 봐도 여기서 나만 동양인이니 알아보기는 참 쉬웠을 거다. 두 명이었는데 처음엔 친구인 줄 알았다. 한 명은 각진 얼굴에 수염이 많아 인상이 무척 강해보였고, 다른 한명은 키도 나랑 비슷하고 얼굴도 작아 좀 더 부드러운 인상을 가졌다.
열차에 올라가자마자 뒤에서 나를 불렀다. 그렇게 그들의 자리에 앉아 얻어먹기도 하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간혹 러시아 말을 몰라도 대충 “다, 다, 다”라고 말하면서 끼어 들었다.
말이 끊기면 서로의 사진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엘롯은 러시아인으로 배를 타는 친구라 한국 부산에도 가봤다며 찜질방이나 부산 시내 사진을 보여줬고, 험난한 파도에 배가 휘청이는 동영상을 보기도 했다. 무스타파는 체첸인이었는데 군인이라 총을 들고 있는 사진, 고향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아이와 어울리는 사진을 보여줬다.
체첸이면 우리에겐 익숙한 러시아 내전이 있는 지역인데, 무스타파를 만나고 처음 알았다. 북캅카스(코카서스)는 거의 무슬림이고, 체첸어가 따로 있고, 조지아(그루지야)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심지어 여권까지 있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체첸은 나라로 인정받은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테러로 더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어찌나 와서 얘기를 하자고 하던지. 심지어 엘롯은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했을 때 역 밖으로 나가자며 나를 끌고 갔다. 스탈린그라드는 과거 독일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지금은 볼고그라드로 이름이 바뀐 지역이다. 30분 이상 정차하는 시간을 이용해 밖으로 나간 건데 딱히 역 밖에는 별 거 없지만 이 친구가 뭔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아이스크림까지 사줘서 먹었다. 새벽에 엘롯은 떠났고, 무스타파도 다음날 오후 아제르바이잔 국경에 도착하기 전에 내렸다.
#2
그 다음에 만난 사람들은 내 바로 뒷좌석에서 말을 걸었던 러시아인 2명이다. 중국인인 줄 알고 구글 번역으로 대화를 시도하다가 내가 “까레야”라고 말하자 한국 사람인 걸 알았다. 여행하는 사람이 신기했는지 이것저것 물어봤다. 물론 말은 안 통했지만.
둘 다 러시아 북쪽에서 남쪽 마하치칼라까지 가는 중이었다. 우리는 사진을 찍은 후 블루투스로 사진을 서로 공유했다. 잠시 후 이들의 목적지인 마하치칼라에서 내렸고, 난 이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내 옆에 있던 할머니의 짐을 날라 드렸다.
분명 이 열차를 탈 때만 하더라도 심심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상대를 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3
아제르바이잔 국경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많이 내려, 1층 좌석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내 자리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냐고 승무원이 물어봤고, 난 상관없다 했다. 순식간에 등장한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고, 그들은 나에게 음식을 건넸다. 뭔가 재밌는 상황이었다.
#4
아제르바이잔으로 가는 여행하는 외국인은 나 혼자라(아제르바이잔 입국카드도 러시아로 적힌 것밖에 없었다) 국경에서 수많은 질문을 받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거의 취조를 당하는 것처럼 질문이 쏟아졌다.
먼저 러시아 국경에서는 대략 이런 질문을 받았다.
“어디서 입국했나?”
“블라디보스토크? 거기에 배가 있나? 그 배는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배인가?”
“러시아 비자는 어디 있나?”
“직업은 뭐였지? 회사 홈페이지를 알려줄 수 있나?”
이 모든 답변은 루스란이 통역을 해줘서 가능했다. 맨 뒷자리에 앉았던 루스란은 내가 국경에서 불려 열차의 앞으로 나갈 때 같이 불려 나갔던 사람이다. 분위기가 험악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국경이라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국경에서는 2시간 멈춰 있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인 엘마르에게 물어보니 원래 이렇다고, 다시 아제르바이잔 국경에서 2시간 정차할 거라 했다.
아제르바이잔 국경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관심 승객’이었다. 여권과 비자를 들고 열차 앞으로 불려가서는, 러시아 국경과 동일하게 루스란이 통역을 해주는 대로 대답을 해야 했다. 여전히 그들은 궁금한 게 많아서 비자는 어디서 받았는지, 입국 목적은 무엇인지, 아제르바이잔을 왜 여행하려 하는지(이건 대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 등 엄청나게 쏟아지는 질문을 받았다.
그나마 아제르바이잔 국경은 그리 딱딱한 느낌은 아니었다. 정말 웃겼던 것은, 아니 운이 좋았던 것은 내 비자가 7일부터 시작인데, 국경을 넘을 때 11시 53분이었던 거다. 내가 웃으면서 7분 뒤에 7일이라고 말하니, 그들도 웃으면서 7분 뒤에 도장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5
“헤이, 킴. 괜찮아?”
자리로 돌아온 나에게 어떤 아저씨가 다가와 물었다. 그래, 입국만 하면 뭐든지 괜찮은 상황이었다. 딱히 내가 잘못한 게 없었으니까. 몇 십 분 뒤 열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 육로 입국을 알리는 신호였다. 엘마르는 나에게 “웰컴 투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말을 하며, 루스란과는 입국 성공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었다.
더 웃겼던 건 그 다음이다. 멀리서 ‘킴’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보니, 여럿이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 거다. 가자마자 내 손에 쥐어준 것은 다름 아닌 보드카. 이슬람 국가에서 술을 마셔도 되나 싶지만 이들은 쭉 들이키는 내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음식도 넙죽넙죽 얻어먹었다. 맥주, 오이, 토마토, 빵. 난 배부른데 빵을 계속 준다. 물론 술은 승무원 몰래 마셔야했지만. 아무튼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사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난 유쾌했던 이들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보드카를 한 잔 더 들이키며, 노트에 적었다.
아킨, 엘친, 아사드, 바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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