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상태로 도착한 파리지만 생각보다 쉽게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다만 파리의 지하철에서는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난 북역(Gare De Nord) 부근에 있는 호스텔에서 지냈다. 여태까지 다양한 형태의 숙소에서 지내봤지만 호스텔이 이렇게 큰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전형적인 파티형 호스텔로 밤마다 술마시는 분위기로 정신이 없다. 덕분에 첫날을 제외하고 항상 여러 사람과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파리에서 둘째 날, 날씨가 정말 좋았다. 최근 몇 달간 이런 날씨를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깨끗한 하늘과 솜사탕같은 구름이 떠있었다.
점심으로 먹었던 김치라면, 근데 한국 식당은 아니었다. 얼큰하면서도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아 괜찮았다.
파리에 서둘러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전 회사의 동료와 재회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한국에서 정말 멀리 떨어진 타국에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실 우리도 불과 일주일 전에 알게 되어 아무래도 계획 없이 다니는 내가 급하게 일정을 맞췄다.
파리하면 에펠탑, 에펠탑하면 파리, 어쨌건 내가 그 앞에 섰다.
항상 에펠탑 사진을 보면 멀리서 찍은 것만 있던데 가까이에서 보면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고, 독특한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펠탑 부근에는 야바위꾼이 많다. 정말로 돈 놓고 돈 먹기인데, 공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도박을 하는 모습은 좀 신기했다.
마음에 드는 '흑형'을 발견해 에펠탑 열쇠고리를 구입했다. 가격은 1유로에 5개.
다음날 아침, 한 달 전 뮌헨에서 아주 잠깐 만났던 친구들을 파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정말 깜짝 놀랐다. 무려 같은 숙소에 묵고 있었는데 이 친구들은 마지막 날이라 아침을 먹고 공항으로 갈 예정이었다. 시간도 많이 남았고, 반가운 마음에 그야말로 폭풍수다를 떨며 그간 있었던 일을 주고 받았다. 나도 가난한 여행자라 돈은 별로 없지만 일찍 만났다면 맥주라도 한 잔 샀을거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저녁에는 혼자서 맥주를 마시다가 눈이 마주친 베로니카와 시간을 보냈다. 아르헨티나 사람으로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맡기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여행을 왔다고 했다. 사실 말이 아주 잘 통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잘 웃는 사람이라 대화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른 아침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네덜란드로 떠나는 그들을 배웅했다. 살짝 아쉬웠다.
원래는 다른 계획이 있었는데 약속이 펑크나서 혼자 개선문으로 갔다. 에펠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 유명한 상징물이라 그런지 관광객이 참 많았다. 특히 중국인.
개선문을 한참 구경하다가 에펠탑까지 걸었다. 아직 에펠탑 야경을 못 본 것도 있지만 숙소에서 만난 사람과 저녁에 에펠탑 야경을 같이 구경하기로 약속을 잡은 상태였다.
개선문 앞은 쇼핑거리인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배고픈데 적당한 식당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행을 떠난지 5달 만에 프랑스 파리에 있다.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느새 나는 세느강에 도달했고, 그 앞에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에펠탑이 있었다. 단순한 철골 구조물인데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자극시키는,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어느 관광객에 지나지 않아 쓸데없는 감성을 집어치우고 사진을 찍으며 바라봤다.
난 사실 흔하디흔한 에펠탑의 정면보다 건물 사이에 살짝 드러난 에펠탑이 더 좋았다.
에펠탑 앞에 도착하자 마침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형광등 켜지는 것처럼 하나 둘씩 불이 켜지더니 이내 노란 불빛이 에펠탑을 감싸기 시작했다.
다만 여기서 만나기로 했던 한국 사람은 20분 정도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어차피 아침에 만난 사이였고, 오지 않아도 딱히 별 상관은 할 이유도 없었지만, 쉽게 약속을 깬 거 같아 씁쓸하긴 했다.
과거엔 파리를 '빛의 도시'라고 불렀을 정도로 야경으로 유명했다. 지금이야 더 아름다운 야경이 있는 도시는 얼마든지 있지만 지금도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역시 에펠탑 때문이 아닐까.
에펠탑 하나가 차지하는 야경의 비중은 엄청났다. 특히 7시와 8시에는 에펠탑이 반짝이는데 그 장면을 보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곤 했다.
에펠탑 야경을 본 후 호스텔로 돌아와서 여러 사람들과 와인을 마시며 밤을 보냈다.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던 말레이시아인 수시. 일본 음식인 스시와 글자가 비슷해 외우기가 참 쉬웠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정말 놀랄만한 재회가 있었다. 아르메니아에서 만났던 엘로이지가 무려 파리에 있었던 것인데, 인도에서 불과 며칠 전에 돌아왔다고 했다. 비자 때문에 잠깐 파리에 온 것이고, 이제 다시 몇 주 뒤면 인도로 갈 예정인데 그 찰나에 내가 파리에 있었던 거다. 이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난 아르메니아에서 만났던 레지, 타다스, 올가, 엘로이지가 함께 이란과 인도 등을 여행하는 모습을 보며 엄청나게 부러워했었다. 나도 저기에서 함께 여행하고 싶었으니까. 혼자 여행하니 가끔 외로울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보이는 이들의 사진이 정말 질투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가 같이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니 나머지 사람들이 엄청나게 부러워했다.
엘로이지와 함께 있을 땐 날씨가 정말 좋지 않았다. 항상 우리는 비를 맞으며 파리의 이곳저곳을 걸었다. 골목길 탐방에도 나서고, 혁명광장에서 테러로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곳도 돌아봤다.
호스텔은 매일 파티 분위기였다. 술 마시고, 놀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분명 심심하진 않은 건 좋긴 한데 이게 나중엔 공허한 마음이 들게 했다.
브라질 사람과도 잠깐이었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몽마르뜨 언덕에 올라 시간을 보냈다. 사실 몽마르뜨가 어디에 있는지도, 어떻게 생긴지도 몰랐는데 직접 보니 굉장히 낮은 언덕 위에 성당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기도 유명 관광지라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도 나름 언덕이긴 했으니 파리 시내가 눈에 들어왔다. 다만 회색빛으로 가득한 시내의 모습이 딱히 아름답다고 여겨지진 않았다.
저녁엔 엘로이지를 다시 만났다. 그러나 이날은 비가 엄청나게 왔다. 우리는 온 몸이 다 젖을 정도로 비를 맞으며 돌아다녔고, 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를 괜찮은 골목에서 맥주를 마신 후 중국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파리에서 일주일 째, 살짝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모두 떠났기 때문인 것 같다. 친하진 않았더라도 아주 잠깐이라도 인사를 했던 사람들조차 이제 볼 수 없었다.
기분도 울적한데 맥주나 한 잔 마실까 말까 고민하던 그때 바로 앞 테이블에서 나를 불렀다. 처음엔 날 부르는 줄도 몰랐다. 다시 보니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로 정말 눈인사만 잠깐 했었다. 그렇게 또 친구를 만들었다.
우리는 학생들이 많은 거리로 일부러 나가(한참 떠들다 지하철 역을 4개나 지나친 사건도 있었다) 클럽인지 펍인지 모를 곳을 갔다. 분위기가 딱히 좋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학생들의 풋풋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런 곳이었다. 여기서 프랑스 사람들과 어울려 맥주를 마시고, 게임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은 혼자 파리 시내를 걸었다. 항상 날씨가 좋지 않아 제대로 걸었던 적이 별로 없는데 이날도 딱히 좋지는 않았다. 비만 오지 않았을 뿐.
세느강을 따라 걸었다. 날씨는 흐렸지만 바람은 적당했고, 관광객 틈에 섞여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딜 가나 연인들에게는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자물쇠는 파리에서도 있다. 커플을 보니 배가 아파온다.
내친김에 룩셈부르크 공원까지 걸었다. 다만 룩셈부르크 공원은 별로 볼만한 게 없어서 잠깐 훑어보고 돌아왔다. 여기서부터 북역까지 다시 걸었다.
파리의 골목을 구석구석 걷지 못한 건 많이 아쉽다.
호스텔로 돌아와 잠깐 쉬고 있는데 막 들어온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 잠깐 얘기했는데 엄청 심심했는지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 우리는 호스텔 1층으로 내려가 맥주를 마셨다. 사실상 호주인이나 다름없는 중국계 토니가 말이 엄청 빨라서 조금 문제였지,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눴다. 심지어 중국인 단체여행객을 보면 무슨 생각이드냐는 질문도 했다.
하지만 이날은 정말 피곤했다. 걷기도 오래 걸었고, 잠도 많이 못 잤기 때문이다. 토니가 억지로 날 데리고 내려와 술 더 마시자고 했지만 난 버티지 못하고 올라가 잤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은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로 유명한 베르사유의 궁전을 보러 갔다. 정말 운이 좋게도 3월 첫째 주 일요일이라 무료였다. 물론 미리 알고 갔지만.
이날도 날씨는 딱히 좋지 않았다.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 춥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무료입장이라 그런지 산책을 나온 파리 시민들이 참 많았다.
엘로이지는 먼저 공원부터 걷고, 그 다음에 궁전을 들어가자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게 실수였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공원부터 먼저 가게 되면 나중에 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난 그저 프랑스 사람만 믿었던 건데. 결국 공원을 다 둘러본 후 우린 다시 줄을 서서 궁전을 들어갔다.
벤치에 앉아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공원의 규모가 굉장히 큰데 우리는 그저 튼튼한 다리만 믿고 계속 걸었다.
3시간이 지나서야 우리는 궁전에 입장했다. 궁전 내에는 무료로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주는데 상당히 유용하다. 물론 한국어도 있다.
얼마나 많은 셀카봉이 방해를 했으면 이런 안내판이 보일까.
궁전을 제대로 보려면 오랜 시간을 갖고 천천히 봐야 할 거 같다. 사람들에 밀려 그리고 피곤한 마음에 대충 넘어간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역사적인 사실이라든가 인물에 대한 정보가 조금 더 많아야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궁전의 최대 볼거리인 ‘거울의 방’에 들어설 때쯤에는 심신이 지친상태였다.
베르사유 궁전 여행을 마치고 엘로이지와는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굿바이”라는 말을 하지 말고 “또 만나자”라는 말을 하며 헤어졌지만 무척 아쉬웠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데 공허했다. 마음이 텅 빈 느낌이었다. 난 늘 혼자 여행하는 게 좋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난 늘 외롭기에 누군가를 만나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게 아닌 것인지. 배낭여행자의 숙명과도 같은 헤어짐이 너무 슬프게 다가왔다. 또 누군가를 길 위에서 만나게 될 테지만, 당분간은 슬픔을 견뎌야 한다.
떠나는 날은 날씨가 항상 좋다. 이보다도 날씨가 좋을 수 없다.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려다가 파리에서 리옹까지 거리가 멀기도 하고, 히치하기도 쉽지 않아 보여 거금을 써서 떼제베(TGV)를 탔다. 리옹에서는 히치하기가 쉬울 거라는 것을 이미 보기도 했고, 카우치서핑 호스트의 집을 일찍 가면 그만큼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예상을 했던 거다.
리옹역에서 처음으로 타는 고속열차를 기다렸다.
초기 KTX가 프랑스의 기술이전을 받아서 그런지 떼제베는 매우 친숙해 보였다.
하지만 나의 삽질 여정은 리옹에서도 계속됐다. 호스트 데이빗의 집을 찾지 못해 한참을 돌아다녔고, 결국 떼제베를 탄 보람도 없이 저녁이 되어서야 데이빗과 만날 수 있었다. 이때는 이 삽질이 리옹에서 마지막일 줄 알았다.
아침부터 데이빗의 투어가 시작됐다. 리옹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곳에 올라 경치를 감상했다.
미니 에펠탑처럼 보인다.
우리는 성당에서부터 걸어서 내려와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리옹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던 나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내려와서 산을 바라봐야 성당의 앞 면을 확인할 수 있다.
파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리옹도 관광객이 몰리는 골목이 있다.
데이빗은 현지인답게 숨겨진 장소를 많이 알고 있었다. 평범한 집으로 보이는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 좁은 광장을 나에게 보여줬다.
리옹의 상징인 기뇰(Guignol)은 도시 곳곳에 숨어있다.
데이빗과 점심을 먹은 뒤 난 혼자 리옹 시내를 걸었다. 살짝 덥다고 느껴질 정도로 날씨는 정말 좋았다. 난 걷다가 앉다가를 반복하며 리옹 시내를 둘러봤다.
광장에서 멍하니 앉아 비누방울을 구경하기도 하고,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무거운 옷을 벗고 따스함을 즐겼다. 한가로운 낮, 리옹 시내의 풍경이었다.
비누방울이 나에게 다가왔다.
데이빗의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재밌는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리옹 시내는 파리보다 훨씬 깨끗하고, 밝아 보였다.
자물쇠가 몇 개 있는 걸 보니, 나중에 몇 년 뒤에 이곳을 오면 파리의 그 다리처럼 자물쇠로 가득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다음날, 리옹을 떠나 스위스 제네바로 향할 때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몇 시간을 기다려도 히치하이킹을 할 수 없었고, 결국 리옹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정말 이날의 개고생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졌고, 짧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정말 외롭고,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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