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는 초대해주신 분의 집에서 4일간 편하게 지냈는데 심지어 떠나는 날도 선물로 주셨던 기차표로 오스트리아로 아주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니옹에서 기차를 타고 오스트리아로 바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스위스 최대 도시인 취리히로 갔다.
스위스는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해 이번에는 여행할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고마운 분을 만나 이렇게 짧게나마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취리히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3시간이라 그냥 역 주변만 걸었다.
내가 도착했던 시간이 점심이라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대부분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으로 보이는데 그냥 도시락을 사들고 아무데나 앉아 먹는다. 특히 강가 주변에 많이 앉아 있는데 자유롭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여겨져 마음에 들었다.
트램과 차가 지나다니는 거리 한편에도 앉아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취리히에서 본 거라곤 점심을 먹는 사람들 뿐이지만 뭔가 이 도시의 전부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취리히에서 기차를 타고 4시간 걸려 도착한 곳은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보니 엄청난 설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독일을 비롯해 부르크(Burg)로 끝나는 도시가 많은데 인스브루크는 이 도시에 흐르는 인(Inn)강과 다리를 뜻하는 브루크(Bruck)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날씨도 정말 좋았다. 그냥 지도만 찍고 이동해서 아무 것도 몰랐던 도시인데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길에서 같은 방을 쓰던 호주인 롭을 만나 같이 산을 올랐다. 인스브루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라 괜찮긴 한데 케이블카를 타려면 돈을 더 내야 해서 더 올라가지 못했던 건 아쉬웠다.
분명한 건 오스트리아에는 캥거루가 없다.
인스브루크에서는 3일 지낸 후 잘츠부르크로 이동했다. 비록 프랑스에서 히치하이킹을 실패한 경험이 있지만 다시 히치하이커로 돌아가기 위해 잘츠부르크까지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했다.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는데 25분간 단 한 대의 차도 멈추지 않아 낙담하고 있을 때(고작 25분에 낙담하다니!) 내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잘츠부르크로 바로 가는 차인데다가 아저씨가 배낭여행자를 태운 것을 굉장히 즐거워해서 정말 좋았다.
잘츠부르크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되는 도시이자 오스트리아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관광도시다. 그런데 인스브루크와는 달리 오히려 생각만큼 매력적이진 않았다. 거리가 지저분해 보였으며, 딱히 마음에 드는 건물이나 분위기도 찾질 못했다.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건 이 바이올린을 켜는 아저씨. 바이올린 리듬에 몸을 맡긴 듯 열정적인 공연이 인상적이었다.
말의 콧구멍을 파던 소녀도 인상적이긴 했다.
잘츠부르크성을 보려고 올라갔으나 지갑에 6.8유로 밖에 없어 못 들어가고 내려왔다. 성을 보지 말라는 하늘의 뜻인 건가.
잘츠부르크에서의 마지막 날에는 한국 사람과 만나 수다삼매경에 빠졌다. 아마 5시간은 넘게 이야기 했던 것 같은데 두 분 다 독일에서 살고 있었고, 사진에는 없는 한 분은 잠깐 여행을 왔다고 하셨다.
잘츠부르크를 떠나 이동한 곳은 오스트리아의 시골 마을 라우리스, 이곳에서 벤과 빅토리아를 다시 만났다.
5개월 전 아르메니아 예레반을 여행할 때 벤과 빅토리아의 집에서 무려 10일간 지냈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벤의 부모님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벤 역시 평범한 여행자는 아닌데 벤의 형은 정말 하드코어 여행자로 지금도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누비고 있다. 근데 벤의 부모님이 히치하이킹이나 자전거 여행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하는 걸 보면 이 가족 구성원 모두 평범하지 않은 여행자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
날씨가 많이 좋아졌다 생각했는데 깊은 산 속 라우리스의 날씨는 그게 아닌가 보다. 바람이 무척 매서웠다.
우리는 가볍게 산책을 하거나,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이 리조트 내에 있는 사우나에서 몸을 풀었다.
선물로 불닭볶음면을 줬는데 영국인 벤과 부모님은 별로 먹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시라이인 빅토리아는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시리아인 빅토리아에게는 별로 맵지 않은지 대수롭지 않게 비웠다. 영국인이 먹었어야 좀 재밌는 그림이 나왔을 텐데 뭔가 아쉽다.
3일간 라우리스에서 지낸 후 다음 나라인 슬로베니아로 이동하기 위해 기차를 탔다. 우리는 셀카를 찍으면서 마지막까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초대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분명 6개월 전 여행을 출발할 때 회사 선배들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새 신발인데 벌써 이 모양이다.
실제로는 '루비아나'로 불리는 건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들리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차를 2번이나 갈아타고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도착했다. 좀처럼 쉽게 외워지지 않는 이름이다.
류블랴나에서 가장 좋았던 점이라면 역시 확실히 저렴해진 물가를 꼽을 수 있다. 여전히 유로존이라 아주 싸다고 볼 수는 없지만 프랑스의 살인적인 물가를 겪어 보니 여기는 엄청 싸게 느껴졌다. 맥주 한 잔에 2~3유로면 프랑스의 절반 혹은 1/3 수준이다.
류블랴나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그리 도시 분위기가 밝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돌아다녀 보니 아담하면서도 예쁜 도시 같았다.
류블랴나를 대표하는 성은 올라갔으나 역시 들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들어가 봐야 별 거 없을 것 같았고, 류블랴나 경치를 보는데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냥 가볍게 산책한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류블랴나는 '드래곤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곳곳에서 드래곤을 찾을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드래곤의 다리다.
강을 따라 형성된 카페는 커피를 마시거나 맥주를 마시기엔 정말 좋다.
류블랴나에서 가장 재밌던 장소를 찾아갔다. 예술의 거리쯤 되는 곳이랄까. 곳곳에 독특한 조형물이나 그림이 가득해 사진 찍기엔 최적의 장소다.
재밌다기 보다 괴기스러운 그림도 간혹 보인다.
사진을 한참 찍다가 지붕을 보니 이런 이상한 조형물도 발견할 수 있었다.
꼭 사람들은 다른 자리도 많은데 동상 아래에서 앉아 있다. 여기서 도시락을 먹거나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티볼리 공원에서 산책을 하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내게 다가왔다. 막대기를 입에 물고는 내 앞에 내려놓는데 무척 귀여웠다.
물론 나한테만 놀아달라고 한 건 아니었다.
슬로베니아의 맥주 휴먼 피쉬(Human Fish)를 마시며 여유를 즐겼다. 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딱히 할 게 없었다.
프라하에서도, 파리에서도,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자물쇠 다리는 류블랴나에도 있다.
원래 류블랴나에서 가까운 포스토니아 동굴을 갈까 고민했지만 입장권 가격이 22유로나 하고 사진을 보니 별로 가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아 더 머물지 않았다. 그래도 류블랴나에서 3일이나 있었다.
트램도 없는 작은 도시라서 수도임에도 한적함을 느끼게 한다.
잘츠부르크에서 샀던 라면 하나를 꺼내 먹었다. 진라면은 매운맛보다 순한맛이 맛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딱히 할 것도 없는데 류블랴나 밤거리를 거닐었다. 맥주나 한 잔 할까 하다가 생각을 접고 호스텔로 돌아가 잤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까지는 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확실히 기차보다 가격이 싼 10유로였는데 터미널에서 직접 구입하니 12유로였다. 미리 알았더라면 당연히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는 건데 2유로가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2시간 뒤 드디어 쉥겐을 탈출했다! 작년 12월 27일에 헝가리로 입국한 쉥겐을 금년 3월 20일이 되어서야 빠져나왔다. 쉥겐 체류기간이 딱 5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슬로베니아 여행은 커녕 서둘러 나와야 했던 건 당연했다. 그나저나 쉥겐을 빠져나와서 좋은 점은 저렴한 물가다. 크로아티아 역시 다른 남유럽 국가에 비하면 아주 싸다고 할 수 없지만 슬로베니아보다 더 저렴해진 커피와 맥주 가격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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