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도 아프고 지겨워질 즈음, 전혀 다른 분위기의 대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메켈레에서부터 무려 13시간 버스를 탄 끝에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한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큰 빌딩과 트램을 보고 놀랐다. 역시 수도는 다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만남은 언제나 즐거운데, 재회는 몇 배 더 즐겁다. 수단에 있을 때는 맥주가 없어 콜라만 놓고 맛있는 거 먹고 싶다고 얘기하던 우리였는데 아디스아바바에서 다시 만났다. 그것도 맥주를 놓고. 자전거를 타고 내려온 형근과 진화는 벌써 5번째 만남이었고, 시미엔 트레킹만 10일간 했던 ‘등산 덕후’ 한수와 민아는 수단 하르툼에 이어 2번째 만남이었다. 우리는 정말 신났다. 한참을 떠들다 마침 옆에 있던 다른 한국인 4명과 함께해 자정이 되기 전까지 맥주를 마셨다. 사실 어디에서도 이렇게 많은 한국인이 만나기 힘든데 아디스아바바에서 한국인이 9명이라니, 정말 신기했다.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동안 별 다른 것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동네를 돌아다니는 적도 별로 없었다. 오로지 내 관심사는 다나킬 투어를 하는 도중 갑자기 고장 난 카메라 렌즈를 고치는 것 뿐이었다. 나름 아디스아바바가 큰 도시라 생각했고, 렌즈는 쉽게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며칠 뒤 여기 소니 센터에서 고칠 없다는 말만 들었다. 줌 렌즈이고 가장 많이 사용하는 거라 문제가 심각했다.
9명의 한국인은 여행자인 것도 잊은 채 며칠간 먹고, 마시고, 늘어져 지냈다.
낮에는 한 없이 늘어져 있다가 저녁이 되면 모여서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단순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모이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었다. 다만 한 명만은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에티오피아 여행 첫날 1400달러와 여권 등이 들어있던 작은 가방을 도둑 맞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이라면 긴장을 풀었던 여행자의 잘못도 있다고 말하겠지만 너무 최악의 상황에 나도 놀라고 걱정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에티오피아 한국 대사관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무책임한 태도로 열 받게 했다고 한다. 역시 한국 대사관의 위엄이란.
에티오피아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음식밖에 없었다. 과일가게의 샐러드도 정말 맛있었고,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고기와 함께 먹는 인제라도 정말 맛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아디스아바바의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다. 가뜩이나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별로였는데 아디스아바바는 더 심했다. 어떤 놈은 다른 한국인에게 사기 치려는 거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수포로 돌아가자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때는 널 죽여버릴거야.”라는 말을 서슴지 않게 말했다. 뭐 별 미친놈을 봤나, 라고 말하며 돌아섰지만 아디스아바바가 싫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때만이 아니라 아디스아바바에서 이상한 놈을 정말 많이 봤다.
낮부터 정전이 돼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도 각자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냈다. 각자 개성이 뚜렷하고,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 대체 저 나이 때 난 뭘 했나 싶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10시간 넘게 전기를 쓸 수 없음에도 기타를 치며 즐겁게 놀았다.
오로지 고기를 먹겠다는 이유만으로 정전으로 깊은 어둠이 내려 앉은 아디스아바바를 걸었다. 곤다르나 다른 도시에서는 에티오피아식 고기 요리를 쉽게 볼 수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아디스아바바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이날도 결국 고기를 찾아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못 찾아, 늘 가던 우투마 호텔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확실히 여행을 1년 넘게 했지만 9명이나 되는 한국인을 한꺼번에 만난 적은 처음이었다. 3일간 함께 했던 우리는 이날을 마지막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른 새벽 은수, 보혜, 승만이 에티오피아의 북동쪽에 있는 하라르로 떠났다. 이들은 나중에 돌아올 예정이긴 했지만 비행기를 타고 곧바로 탄자니아로 갈 예정이라 다시 만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아침에는 형근과 진화가 자전거를 타고 남쪽으로 떠났다.
오후에는 한수, 민아, 용근이가 남쪽에 있는 아와사로 떠났다. 그렇게 모두 떠나니 나 혼자 남았다. 늘 혼자였지만 갑자기 많은 사람이 떠나니 허전했다.
저녁에는 곤다르에서 만났던 에티오피아인 아스랏을 다시 만났다. 나를 만나자마자 반가워하며 먼 식당을 데려가고, 좋은 펍에 데려가서 맥주를 사준 것까지는 정말 좋았다. 가볍게 맥주 한 잔 마시는 것으로 마무리하자는 내 제안을 뿌리치고 갔던 시끄러운 클럽에서 갑자기 이 녀석이 내 휴대폰을 들고 사라졌을 땐 정말 황당했다. 1시간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다행히 숙소와 가까워 들어가 잤다.
다음날 아침부터 전화를 해보니 받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묵고 있던 바로 호텔의 직원들은 너무 불친절했다. 휴대폰을 훔쳐갔다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어 결국 경찰서로 갔다. 피아사(에티오피아에서는 센터를 피아사라고 함)에 있던 경찰서는 오늘 중요 미팅이 있으니 내일 오라고 해서 짜증이 났고, 그 앞에서 만난 통역을 해주는 인간은 내 휴대폰을 가지고 간 놈을 잘 안다며 아주 악질이라는 말로 날 설득했다. 통역을 쓰면 난 500비르를 내야 했다. 난 통역을 거부하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경찰서를 찾아 다녔다. 결국 가장 큰 경찰서에 도달한 후, 상황을 설명하자 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만약 도둑이라면 잡기는 매우 쉬웠다. 같은 날에 수단 국경을 넘었고,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며, 사진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상황을 설명하는 와중 그 녀석이 전화를 받았다. 경찰에게 말하길 어제 너무 취해서 잠깐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자신은 도둑이 아니라고. 약 2시간 뒤 휴대폰을 돌려 받았다. 택시를 통해. 전화 통화로 해명을 들을 때 일을 하고 있어 직접 갈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뭔가 찝찝했지만, 어쨌든 휴대폰을 찾았다.
결국 휴대폰 때문에 아디스아바바에서 하루 더 머물게 되었고, 우연히 갈리와 샤론을 다시 만나 저녁을 함께 먹었다. 이들은 우간다로 바로 날아갈 예정이었다.
숙소에 있을 때 이보가 먼저 나에게 다가와 자신을 기억하냐고 말했다. 뭔가 익숙했는데, 기억해 보니 이집트 카이로에서 잠깐 만났던 독일인 여행자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1달 만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일도 생긴다.
아와사로 이동할 때는 로컬 버스를 이용했다. 원래 고급 버스인(왜 고급인지도 모르겠지만) 스카이 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다음날 출발하는 버스가 취소됐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로컬 버스 가격이 더 싸지만 스카이 버스 가격도 그리 비싸진 않았다. 로컬 버스를 타러 걸어가는 도중 시장을 마주했다. 아디스아바바에 5일 동안 있는 동안 제대로 돌아다녔던 적은 경찰서를 찾아 걸었던 적이 전부라 이런 골목이 있는 줄도 몰랐다.
트램인지 열차인지 경계가 모호한 것이 아디스아바바의 중심부를 관통한다. 새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굉장히 깨끗하고 현대화 됐다. 타보지 않은 건 조금 후회가 된다.
한참을 걸어가 로컬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내가 탈 버스는 예상보다 훨씬 무난해 보였다. 12시쯤에 출발한 버스는 5시에 아와사에 도착했다.
메켈레와 아디스아바바에서 잠깐 만났던 일본인 친구 레나가 머물고 있다는 패밀리 펜션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고, 현지인에게 물어봐도 서로 다른 방향을 알려줘 1시간 이상을 헤매고 다녔다. 겨우 패밀리 펜션을 찾아 체크인을 하고 1시간 뒤쯤에는 레나와 다시 만났다.
아디스아바바에 있을 때도 정전으로 10시간 가까이 전기를 쓰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아와사 역시 도착한 첫날부터 정전으로 동네가 암흑으로 변할 정도로 심각했다. 어두워진 거리를 걷다가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커피를 한 잔 마시러 나갔다. 직접 다려주는 커피가 아니라 보온병에 담긴 커피를 마셨지만 사람들은 유쾌해 마음에 들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와사는 아디스아바바에 비해 평화로웠다. 혼잡하지 않았다. 거리에 사람도, 차도 그리 많지 않았다.
가브리엘 교회 근처에는 독특한 외형의 탑이 하나 있다.
교회 입구, 벽면에 머리를 대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와사에서 뭘 보겠다는 생각도 없어서 그런지 레나와 나는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근처에 있던 타임 카페에 가서 쥬스를 마셨다. 내가 선택한 것은 5종류의 과일을 섞은 쥬스였는데 상당히 맛있었다. 그리고 이때는 와이파이 신호가 안 잡혔었는데 나중에 다시 갔을 때는 매우 빠른 와이파이를 쓸 수 있었다.
아와사는 호수를 끼고 형성된 도시로, 호수에 가면 괜찮은 풍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레나는 이미 아와사에서 며칠 지냈기 때문에 호수에도 가봤지만 나는 처음이라 점심도 먹을 겸 호수를 향해 걸었다.
호수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커다란 팰리컨 무리였다. 사람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생선 조각이나 껍질을 팰리컨에게 주고 있었는데 입을 쩍 벌리고 다가오는 모습은 그리 사랑스럽진 않았다.
호수 근처는 걷기 좋았다. 그렇다고 호수가 경치가 근사하지도 않았지만.
재밌는 점은 팰리컨들이 어디에나 보인다는 거다. 바로 눈앞에서 날개 짓을 하는데 좀 신기했다. 다만 하얀색 팰리컨은 괜찮은데 검은색의 팰리컨은 좀 징그럽게 생겼다.
호수가 바로 옆이니 생선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건 당연했다. 맛은 괜찮았는데 한 마리로는 많이 부족했다.
호수에서 배를 타고 돌아다니거나 야생동물을 볼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이 있지만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와사의 시장을 지나쳤다. 물론 여기서도 가장 많이 들은 소리는 ‘차이나’였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중국인이냐는 소리에 지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 난 그러지 못했다. 심지어 에티오피아에서는 대부분 놀리는 것처럼 “유! 유! 유! 차이나!”라고 하거나, “칭쳉총!”이라는 말을 하며 지들끼리 키득거릴 때는 정말 패주고 싶을 정도로 깊은 빡침이 올라온다. 다른 나라는 그냥 넘어가도 에티오피아에서 이런 취급을 받으면 정말 욕 나온다.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정전이 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식당은 메뉴판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어두웠다. 당연히 밝은 곳에서도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는데 이렇게 어두운 데서 정상적인 사진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었다.
아와사의 중심 거리는 제법 밝았지만 어느 골목으로 진입하자 불빛이 아예 없어 굉장히 어두웠다. 어떻게 이리 어두울 수 있냐며 레나는 극도로 불안함을 보이며 내 팔을 잡았다. 사실 무서울 만했다. 나 역시 혼자였다면 식은땀을 흘린 채 걸었을 테니깐.
무서웠던 골목을 벗어난 후 레나에게 맥주를 한 잔 더 하자고 제안했다. 숙소 바로 옆이라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고, 가볍게 한 잔 더 하러 들어갔다. 두 명의 외국인 등장으로 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한 곳으로 모아졌다. 대부분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 뿐이었는데, 구석진 곳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는 한 남자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자제시킬 정도로 매너가 좋았다. 우리는 딱 맥주 한 잔만 마시고 사람들과 인사를 한 뒤 나왔다.
아와사에서 3일째, 어차피 별로 할 일도 없어 숙소에서 늘어져 있다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도대체 레나는 일주일 동안 여기서 뭘 했는지 모르겠다.
점심 먹고 돌아와 저녁 먹으러 나갔다. 조금 멀리 떨어진 그럴 듯한 곳에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이건 정말 맛있었다. 우리 모두 감탄을 하면서 먹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레나가 먼저 하나 더 먹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역시 에티오피아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음식’뿐이었다. 수단과는 달리 사람이 별로였으나 음식만큼은 정말 최고였다. 이러는 와중에 레나는 “원래 에티오피아가 베드버그와 배드피플로 유명해.”라는 명언을 남겼다.
숙소로 돌아온 후 레나는 나에게 100달러를 빌려줬다. 그것도 아무 조건도 없이. 달러가 전혀 없어 레나에게 바꿀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사실 에티오피아 비르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레나는 환전을 해줄 수 없다고 했었다.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도중 레나는 100달러를 그냥 줬다. 아직 100달러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주지 못한 상황인데도 나를 믿는다면서 말이다. 언제 다시 만날지도 알 수 없는데 돈을 주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아무튼 달러를 주면서 내가 무척 가보고 싶었던 소말릴랜드 돈도 기념이라며 함께 줬다. 여태까지 미승인국을 5군데나 가봐서 그런지 이번 아프리카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나라가 소말릴랜드였는데, 에티오피아 비자가 단수였던 문제를 비롯해 여러 사정이 걸려 가지 못했다. 레나에게는 내가 가봤던 미승인국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화폐인 루블을 선물로 줬다.
아와사에서 3일이면 충분히 오래 있었다. 일주일 넘게 있었던 레나가 떠나는 날, 나도 떠났다. 다만 우리는 방향이 달랐다. 나는 국경 마을인 모얄레로 가려고 했지만 레나는 독특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부족을 보고 싶어 아르바민치로 갈 예정이었다. 우리는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버스터미널을 향해 걸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아직 5시가 되기 전이라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경찰은 5시에 버스가 있다며 벤치에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벤치에 앉으려고 하는 그때 뭔가 심상치 않은 물체가 바닥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이었다. 이 주변에는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추위에 벌벌 떨며 잠을 자고 있었다.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안타깝게도 아와사에서 모얄레로 한 번에 가는 버스는 없었다. 일단 딜라에 가면 버스가 있다고 해서 올라탔다. 아와사 이후로는 계속 비포장도로라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3시간이나 걸렸다.
모얄레로 가는 버스는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시간으로 5시라고 해서(에티오피아는 독자적인 시간을 사용해 여행자로 하여금 혼란을 준다) 오전 10시인 줄 알았는데, 11시였다. 3시간 넘게 기다리는 것도 지겹고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바나나를 사먹고, 커피를 마셨다.
분명 지도에는 명확하게 도로로 표시돼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비포장도로였다. 에티오피아는 아디스아바바를 벗어나면 대부분 문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중동지역에서 많이 씹는 챠트(까트라고도 부르는 이 식물은 중독성이 심한데다가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마약류로 수입을 규제하고 있다)를 승무원이 씹으려다가 나를 보고는 하나 건넸다. 처음에는 사양했는데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하나 달라고 했다. 하나 먹어보니 씁쓸한 맛만 났을 뿐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당연히 한 주먹을 입에 털어 넣는 현지인과 비교할 수는 없다.
어처구니 없게도 버스는 모얄레가 아닌 야벨로라는 지역에서 멈췄다. 저녁 6시라는 늦은 시각이기도 했고, 이 버스는 모얄레까지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진작 말해주던지 왜 모얄레로 간다고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낯선 마을에서 숙소부터 찾아야 했다. 다행히 버스에서 만난,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친절한 에티오피아인 타무랏과 함께 싸구려 숙소에 체크인했다.
에티오피아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였지만 이곳도 밤이 되자 정말 어두웠다.
우리는 저녁으로 염소고기 요리를 먹고, 맥주를 두 병 마셨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피곤한 여정을 마무리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 모얄레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피곤했다.
예상과는 달리 4시간 만에 국경마을 모얄레에 도착했다.
에티오피아의 다른 도시와 달리 모얄레는 유난히 무슬림이 많이 보였다. 이는 케냐쪽 모얄레(조금 신기하게도 국경을 넘어 케냐의 국경 마을도 모얄레라는 이름을 썼다)도 마찬가지였는데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약 90%가 무슬림이라고 했다.
원래는 에티오피아 국경을 넘지 않고 하루 머무르려 했다. 그런데 곳곳에서 “유! 유! 유!”하는 소리에 짜증이 나 오늘 국경을 넘자고 마음을 바꿨다. 그런데 국경에서 문제가 생겼다. 멍청한 직원이 내 3개월짜리 비자를 가지고 태클을 걸었다. 비자를 발급 받은 날로부터 이제 1달이 지났으니 너는 통과할 수 없다는 황당한 말을 했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직원이 영어도 못 읽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 말만큼은 참고 내 비자는 3달짜리라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자신은 이런 비자는 처음 본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몇 번이고 자세히 읽어보라고, 여행자가 국경 직원에게 설명하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리고 내 비자가 혹여나 1달짜리라 하더라도 입국은 10일에 했고 체류는 26일이니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몰아붙였다. 그제야 조금 이해를 했는지 상관에게 전화를 하다가 내 비자를 종이에 옮겨 적고 도장을 찍어줬다. 짜증이 엄청났다.
케냐 국경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동아프리카 3국(케냐, 우간다, 르완다) 비자를 100달러 주고 쉽게 발급 받았고, 별 다른 질문도 없었다.
에티오피아를 빨리 넘어 케냐로 가면 좀 더 나아지겠지, 라는 생각으로 국경을 넘었는데 오산이었다. 오히려 케냐쪽 모얄레가 더 열약했다. 와이파이 사용은 기대할 수 없었으며, 숙소도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말 그대로 잠자리 그 이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케냐쪽 모얄레에서 미친놈을 많이 만났다. 대뜸 나에게 “죽여버릴거야!”라고 말한 놈이 있는가 하면 아디스아바바에서 만났던 용근이의 모자를 훔쳐간 놈을 마주하게 됐다. 정말 뻔뻔하게도 태극기가 있는 모자를 당당히 쓰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가 모자를 낚아 챈 후 내 친구 거니까 내놓으라고 했는데 당황한 그 녀석은 다시 내 손에 있던 모자를 뺏은 뒤 자기 거라며 우기기 시작했다. 결국 욕까지 하면서 싸우게 됐는데, 순간 내가 뭐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여행을 할 때는 침착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국경에서부터 계속 목소리를 높여왔던 것도 있고, 혼자인 나와는 달리 그 녀석은 친구랑 같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성격은 드러워 지는 것 같다. 모자는 확보하지 못한 채 일단 철수했지만 모얄레는 빨리 떠나고 싶어졌다.
오후에는 일본인 여행자 도나와 토모를 만나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술 취한 현지인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 말을 걸곤 했다. 우리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지만 막무가네로 앉았다. 그나마 시비를 안 걸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미칠 것 같았다. 여태껏 무수히 많은 국경을 넘어봤지만 모얄레는 최악의 국경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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