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아닌 승합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코차밤바(Cochabamba)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였다. 낯선 곳인 데다 근처가 시장이라 정신이 없었다. 여기서 직선 거리로 몇 킬로미터 이동하면 예약했던 숙소를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아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는지 물었는데 모두 택시를 타라는 것이었다. 근데 택시 가격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비싸 몇 차례 그냥 보냈다. 그러는 동안 주변 사람들과 되지도 않는 스페인어로 얘기도 하고, 하이파이브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콜렉티보가 있어 쉽게 갈 수 있었다.
다음날 숙소에서 만난 독일인 친구와 코차밤바를 본격적으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 전에 아침으로 볼리비아 음식인 살테냐를 먹어봤다. 남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군만두 같은 엠빠나다인 줄 알았는데 내용물이 걸죽한데다가 훨씬 달달했다.
론리플래닛에서는 아로마 대로(Avenida Aroma) 아래는 위험하니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되어있다. 실제로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로마 거리 위로는 도시가 상당히 깨끗해 걸어서 돌아보는데 무척 좋았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이 지역에 머문다.
한참을 걷다 보니 예수상이 있다고 하니 산페드로(San Pedro)가 보였다. 계단을 따라 올라갈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안전하고 편하게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케이블카가 그리 많지 않아 조금 기다려야 했다. 잠시 후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따라 올랐는데 계단이 많아 걸어서 올라갔다면 무지 힘들었을 것 같다.
정상에 도착하니 거대한 예수상이 보였다. 이 예수상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한다. 물론 리우데자네이루(사실 히우지자네이루라 불러야 함에도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리우라고 부른다)의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예수상이 더 유명하지만.
코차밤바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미를 여행할 때부터 무계획이었던 터라 브라질 여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예수상을 보지 못한 게 무척 아쉬웠는데 대신 코차밤바에서 나름 크다는 예수상을 봤으니 대리만족을 했다.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상 앞에서 나도 남들과 같이 사진을 찍어봤다.
산페드로에서 내려온 후 다시 무작정 걷다 아르마스 광장으로 향했다. 거리에서 알 수 없는 복장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어 잠깐 흥미를 가지고 지켜봤다.
물가가 비싼 아르헨티나나 칠레와는 달리 볼리비아에서는 어딜가도 부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장에 가면 배낭여행자가 기대할만한 것들이 많았다. 시장 한편에는 과일을 쌓아두고 거의 얼굴만 내밀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있는데 우리가 다가가자 서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 자리에서 과일을 갈아 주는 주스 가게였다. 망고와 파인애플을 섞어 마셔봤는데 정말 맛있었다. 독일 친구가 다 마시고 나서 컵을 주자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주스를 또 채워줬다.
시장은 언제나 즐겁다. 현장감이 넘친다.
코차밤바에서 버를 탔던 적은 없지만 화려한 색상의 낡은 버스를 여러 번 봤다. 흡사 필리핀에서 보던 지프니같다.
언제 봐도 부자연스러운 볼리비아 스타일은 인상적이다.
남미는 항상 광장을 중심으로 성당과 주요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코차밤바도 마찬가지였다. 낮에도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데이트를 즐기거나 휴식을 취했다.
원래 내 계획은 코차밤바에서 하루 정도만 더 머무르고 수도 라파스(Lapaz)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독일인 친구 리오파드가 토로토로(Toro Toro, 실제 발음은 또로또로)를 같이 가자고 꼬셨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수크레에서 만났던 네덜란드인 디미트리가 토로토로를 추천했던 기억이 나서 못 이기는척 같이 가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호주인 여행자 리사도 합류했다. 토로토로로 가는 방법은 전용 버스터미널에서 밴을 타면 된다. 그런데 사람이 다 차야 출발한단다. 고작해야 14명 정도 타는 밴인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1시간을 기다린 끝에 토로토로로 가는 사람이 모였고,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낡은 밴은 출발했다. 토로토로는 코차밤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깊은 산속에 있어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따라 달려야 했다. 무려 4시간 반이나 걸렸다.
엉덩이가 들썩이는 승차감은 이곳이 얼마나 외진 곳임을 알려준다. 여행자는 왜 이런 곳까지 찾아오는 걸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토로토로는 무척 작은 마을이지만 여행자, 특히 서양인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 이유는 독특한 지형을 따라 트레킹을 할 수 있고, 공룡의 발자국과 같은 화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칠레 남부에서 토레스델파이네 트레킹을 한 이후 다시는 산을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나는 또 트레킹을 하기 위해 와버렸다. 의욕이 넘치는 두 여행자는 남는 시간을 이용해 짧은 트레킹을 하자고 한다. 게으른 나라도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이끌려 걸어야 했다.
토로토로에서 트레킹을 하려면 무조건 가이드와 함께 가야 한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4시간 정도면 돌아볼 수 있는 코스로 그리 어렵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실제로도 동네 뒷산을 가는 느낌으로 가볍게 다녀올 수 있었다.
좁은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독특한 지형이 나온다.
지반이 융기해 드러난 산은 거대한 공룡의 등을 보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이곳에 있는 가이드들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물론 옆에서 리사가 통역을 가끔 해주긴 했지만 내가 직접 알아듣지 못하니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줘도 답답했다.
주위에 있는 돌을 들어보면 아주 오래전 이곳이 바다였음을 증명해준다.
첫날 트레킹은 짧기도 했고, 생각만큼 볼거리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경치는 근사했다.
트레킹을 마치고 마을로 내려오니 저녁이었다. 숙소 바로 앞에는 시장이 있는데 지도에는 시장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음식을 준비해서 내다 파는 일종의 식당이었다. 이곳은 볼리비아 현지 물가에 맞춰져 있어 무척 저렴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많은 외국인 여행자들이 이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도 여기서 간단하게 허기를 채웠다.
너무 이른 시각이었지만 숙소에는 와이파이도 없어 무척 심심했다. 바람이나 쐬자고 밖으로 나가 콜라 한 병을 들고 서 있는데 어떤 여행자가 나를 수크레에서 봤다며 인사를 건넸다. 그의 친구와도 인사를 나누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꽤 말이 잘 통했다. 사실 나랑 같이 여행하고 있는 리오파드와 리사는 별로 친근하지 않았는데 이 친구들은 꽤 괜찮아 보였다.
아침부터 다시 트레킹을 위해 짐을 챙겨 나왔다. 시장에서 간단한 샌드위치를 사고, 물을 샀다. 낡은 집 사이 길을 걸으니 시간을 거슬러 가는 기분이 들었다.
토로토로에서 트레킹을 하려면 무조건 공원 맞은편에 있는 이 여행사를 통해 여행허가증과 투어비용(정확히 말하면 가이드비)를 내야 한다. 가이드 비용은 무조건 한 팀 당 똑같이 때문에 아침에는 트레킹을 하려는 외국인 여행자들이 이곳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가게 되면 조금이라도 더 저렴해지니깐. 우리도 스페인과 네덜란드 여행자와 함께 트레킹을 하게 되었다.
언제 봐도 공원에 있는 거대한 공룡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토로토로에서는 여러 트레킹 코스가 있지만 하루에 두 개를 묶어서 갈 수도 있다. 이번 코스는 마을에서 조금 멀어 차를 타고 이동했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한참을 이동하니 깎아지른 절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거의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서 트레킹을 시작했다.
때로는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곳을 걸어야 했다.
토로토로를 대표하는 지형 중 하나가 바로 이곳 동굴이다. 거대한 바위가 만들어준 동굴은 겹겹이 여러 개가 겹쳐 있고, 그 사이를 지나갈 수 있다.
완전히 막혀 있는 동굴이 아니라 햇빛이 위에서 쏟아진다.
시원한 바람과 경치를 즐기기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까? 우리는 커다란 바위에 앉아 자연을 만끽했다.
다음 트레킹 코스는 공룡 발자국을 본 뒤 동굴로 들어갔다.
여행을 하면서 가끔 동굴을 들어간 적이 있는데 이번처럼 아예 아무 것도 안 보이는 동굴을 탐험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플래시를 끄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아무 것도 없는 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하수가 흐르고, 오랜 시간을 거쳐 석회암을 녹여 만들어진 종유석과 석주가 보인다.
분명 길이 없다고 생각하면 가이드는 바위 틈을 기어서 가거나 미리 준비되어 있는 줄을 잡고 올라갔다. 앞은 깜깜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공간에서는 가이드가 말을 하지 말고 플래시를 꺼보라고 했는데 눈앞에는 암흑만 가득했고, 고요함이 지나쳐 무서울 정도였다.
보통 동굴을 들어간다고 하면 가볍게 몇 분 정도 걸어보고 돌아오는데 여기는 1시간 넘게 동굴에서 걸었다.
몸이 간신히 지나가는 통로를 지나 드디어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가 나타났다. 밝은 빛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땀을 흠뻑 흘리고 마을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동네 한 바퀴를 돌아봤다.
불량 식품처럼 느껴지는 아이스크림에 눈길이 가서 하나 달라고 했다.
사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볼거리는 없지만 뭔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거리에 앉아 노닥거리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를 돌길을 따라 걸으면 별 거 없는 이곳이 좋아진다. 난 이렇게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싶었다.
공원에서는 아이들을 만났다. 말은 잘 안 통했지만 환하게 웃는 아이들이 무척 귀여웠다.
다음날에도 이른 아침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마을 부근에 있는 공룡 발자국을 보면서 걷는 코스였다.
토로토로가 유명한 것은 트레킹보다도 공룡 발자국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크레에서 봤던 공룡 발자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선명했다.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해줬지만 스페인어를 모르는 나는 답답했다. 중간에 통역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진흙이 있던 곳으로 공룡이 지나가다 발자국이 남았는데 세월이 흘러 진흙이 굳고, 그 위에 흙이 덮이고 압력이 가해져 발자국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발자국의 크기나 모양을 보고 어떤 공룡인지 추측하기도 한다.
마을을 벗어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했다. 밤에는 날씨가 쌀쌀했는데 낮에는 강렬한 태양이 머리 위에서 내리 꽂는다.
여러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퇴적층이 세월의 흔적을 알려준다.
이런 곳은 재미있는 지형이 많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돌다리를 건너본다.
강아지 한 마리가 마을에서부터 계속 따라와 너무 웃겼다. 마치 자신도 트레킹을 즐기는 것처럼 우리가 가이드 설명을 듣기 위해 잠시 멈추면 강아지도 옆에서 앉거나 누워 기다리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 벌떡 일어나 쫓아왔다.
조금 더 이동하니 또 다른 공룡 발자국이 나왔다.
이게 공룡 발자국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그게 더 궁금하다. 두 세 사람이 저 발자국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
한참 걷다 보니 시원하게 뚫린 계곡이 나왔다. 얼마나 깊은지 아래가 보이지도 않았고, 전망대 역할을 하는 다리에 가면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 들어 아찔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경치를 감상했다. 날개를 활짝 펴고 멋지게 날아다니는 콘도르가 보였다.
절벽의 단면에서 세월에 따라 형성된 퇴적층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설마 했는데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물론 강아지도 우리 뒤를 계속해서 쫓아왔다.
계곡 아래에는 여러 물줄기가 내려오는 폭포가 있다. 늘 보던 폭포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깊은 계곡 아래까지 트레킹을 즐기는 여행자들에게 좋은 휴식처다.
어디서 왔는지 꽤 많은 현지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수영을 하거나 폭포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다. 처음부터 우리를 따라오던 강아지는 사람들이 주는 간식에 눈이 팔려 우리가 떠나든 말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토로토로에서 잘 정돈된 트레킹 코스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바위 사이를 뛰어 넘기도 하고, 좁은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야 했다. 절벽을 내려왔으니 이제 올라갈 일이 남았는데 이상하게 그리 힘들지 않았다. 물론 같이 트레킹을 했던 미국인 친구의 다리가 안 좋아 처지긴 했지만 거의 30분을 앞질러 올라갔다. 아무래도 칠레 토레스델파이네에서 죽을 만큼 힘들었던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마을로 돌아가는 중간에 다시 공룡 발자국을 본 뒤 황량한 벌판을 계속 걸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몇 시간을 걸으니 땀이 주르륵 쏟아졌다.
멀리서 마을이 보이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미국인 친구들이 가장 반겼다. 아무런 기대도 않고, 토로토로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와서 2박 3일간 트레킹을 했는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시원한 콜라부터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리오파드가 볼리비아에서만 마실 수 있는 독특한 음료가 있다고 해서 나도 카스카다를 달라고 했다. 비슷한 탄산음료인데 사과맛이 났다. 나쁘지 않았다.
엄청나게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트레킹을 모두 마쳤는데 토로토로에서 하루 더 머무는 것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우리는 코차밤바로 돌아가기로 했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시장 근처에서 간단하게 허기를 채웠다.
코차밤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참 어두워진 9시였다. 약간 으슥한 곳에 내려 방향감각부터 찾아야 했고, 택시를 잡으러 큰 도로로 이동해야 했다. 나를 제외하고 스페인어를 잘하고, 혼자가 아니라 그리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호스텔에 도착하니 마음이 편해지고, 안심이 되었다.
딱히 코차밤바에서 할만한 것도 없고 그냥 동네를 한 바퀴 돌거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나저나 남들은 볼리비아에서 우유니만 여행한다고 하는데 나는 생각보다 볼리비아 여행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냥 저녁에 버스를 타러 가도 됐는데 호스텔 직원이 혹시 모르니까 미리 알아보는 건 어떻겠냐고 해서 버스터미널로 갔다. 택시가 아니라 콜렉티보를 타려고 하다 보니 길에서 시간을 한참 허비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추천해 준 볼리바르(Bolivar)를 가서 몇 마디 나누고 야간버스를 예약했다. 스페인어는 여전히 거의 늘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고, 대충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호스텔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귀여운 꼬마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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