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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 일찍 왔다. 오전에 구마모토성을 보고 곧바로 배를 타고 시마바라로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호텔에서 나왔던 탓이다. 근데 일본 여행을 하면서 참 많이 느끼는 것이지만 지독할 정도로 딱딱 들어맞는 교통이 나에게는 편리함보다는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다. 모든 일정을 장소보다도 시간에 맞춰서 짜야하니 여러모로 계산적으로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어쨌든 난 일본의 3대 성(城)이라 불리는 구마모토성 앞에 왔다. 


구마모토성은 항상 8시 30분부터 개장을 했지만 4월부터 10일까지는 5시 30분에 닫고, 11월부터 3월까지는 4시 30분인 이른 시각에 닫기 때문에 미리 시간을 알아놓는 것이 좋다. 물론 나야 이른 아침부터 왔기에 닫는 시간에는 크게 중요치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곳은 구마모토성의 하제가타몬 문이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주차장에서 가까운 호아테고몬 문쪽으로 입장하는듯 했다. 어쩐지 그래서 기다리는 사람이 나 혼자였나? 아직 문이 열리기도 전인데도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관리인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분이 아직 열려면 조금 시간이 남았다고 일러줬다. 나는 살짝 웃음을 지으면서 이미 알고 있으니 문을 열때까지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얘기했다.


비는 살짝 내렸다. 우산도 없었지만 쓰고 다니기에도 애매한 그런 날씨였다. 처마밑에서 비를 피하면서 어서 8시 반이 되라고 지루함을 달랬다.


거의 30분이 되어서야 문의 빗장이 풀렸고, 나는 입장권을 내고 들어갈 수 있었다. 구마모토성의 입장료는 500엔이었다.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차가운 공기만큼 구마모토성도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높게 쌓인 성벽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멀리 천수각이 보였다. 

 
잠시후 나타난 이정표를 보고 살짝 갈등이 생겼다. 천수각으로 갈까?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먼저 가볼까? 하지만 이내 이런 고민을 접고 천수각의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아무래도 천수각은 구마모토성의 최대 볼거리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나중에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또 천수각으로 먼저가면 나머지 구역을 보기는 힘들어 보였다.


일본의 대부분 성들이 그렇지만 구마모토성도 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후 현재는 복원이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상할 정도로 너무 깨끗한 곳이 많으며 복원이 되었음을 짐작하는 외형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일본에 있던 다른 성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슨 지하 굴처럼 뚫린 통로를 지나가니 구마모토성의 중심인 천수각이 있는 곳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를 나오자마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날씨는 흐렸다가 비가 오고, 나에게 남은 시간은 없고 아무튼 여러모로 악조건이었다.


천수각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망루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으로 성의 안과 밖을 쉽게 보고, 병사를 제대로 배치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라고 보면 된다.


잠시 비를 피해 어느 건물에 들어가봤는데 휴게소인지 자판기와 의자가 있었다. 여기에서 쉴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으니 천수각으로 얼른 뛰어갔다.


이미 구마모토성의 입장료를 냈기 때문에 천수각에 들어가는 별도의 입장료는 없었다. 그걸 확인이라도 시켜주는듯 입구에는 한글로 '무료입장'이라고 써있었다.


사실 천수각에는 크게 볼만한 것이 없었다. 일본의 다른 성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천수각 내부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도 있고, 대부분 복원된 형태여서 전시품들이 몇 개 놓여져 있을 뿐이다. 게다가 성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하는 곳이 워낙 많아서 대부분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천수각 맨 꼭대기로 올라왔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구마모토 시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비록 역사적인 장소라고는 하나 바로 코앞에 구마모토 시청을 비롯한 빌딩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게 조금 신기했다. 흐린 날씨에 구마모토 전경을 보고 있다는게 그저 아쉬웠다. 도시라서 상관없으려나?


천수각에 들어온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내려갔다.


천수각을 내려오니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는데 바로 앞에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굴만 집어넣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전통의상, 무사의 판넬이 있었던 것이다. 한번 찍어보고 싶었는데 찍어줄 사람도 없고해서 그냥 구경만 했다.

바로 옆 천막 아래에서는 기모노를 입고 있었던 여인 2명이 있었는데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 말을 걸어봤다. 가끔 일본 영화나 만화를 보면 나오는 나무상자를 굴려서 구슬 같은 것을 얻는 뽑기를 볼 수 있었는데 그런 것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해보려고 하자 너무 이른 시각이라 아직 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대신 그녀들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하니 흔쾌히 천막으로 나와 모델이 되어주었다.


'이제 천수각도 봤으니 슬슬 돌아갈까?' 시간을 보니 구마모토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예약을 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구마모토 페리를 타고 시마바라로 넘어가려면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대충대충 보고 돌아가려고 했을 때 내 앞에는 또 다른 건물이 나타났다. 바로 혼마루 고텐 오오히로마라는 곳인데 구마모토성의 본전 건물에 해당하는 곳이다. 전란으로 소실되었는데 무려 130년만에 복원되어 2008년부터는 관람이 가능했던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이런 곳을 놓칠순 없었다.


혼마루 고텐 오오히로마는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비닐봉지에 담아 들어가야 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새로 복원을 해서 그런지 나무들이 너무 깨끗하고, 광택이 났다. 관람을 하려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한 여인이 나에게 다가서더니 열심히 설명을 해주는 것이었다.

"와까리마셍.... 니혼고....(모릅니다... 일본어....)"

내가 이렇게 말을 했더니 갑자기 한국어로 바꿔 말을 걸었다. 깜짝 놀랐다. 꽤 수준급 한국어를 구사했는데 혼마루 고텐 오오히로마 내부에는 이렇게 한국어로 안내하는 직원에 몇 분 더 계셨다.


내부에는 플래시를 터트려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각 구역마다 직원이 항상 대기하고 있어 안내를 하거나 설명을 해주고 있는 모습은 무척 인상깊었다. 마음만 급해서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는데 모녀로 보이는 한국인 관광객이 내 옆에 있었다.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내가 먼저 인사를 드렸다. 가끔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외에 나가면 이상하게 한국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지는 말자.


다시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혼마루 고텐 오오히로마를 대충 보고 빠져나왔다. 그리곤 구마모토성을 나가려고 호아테고몬 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면서 나에게 남은 시간이 정말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사와 사진을 찍는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마음만 급해서 대충 찍기만 했다. 나는 이제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15분 동안에 구마모토 시내의 호텔로 돌아가 배낭을 챙겨와야 했고, 다시 배낭을 메고 버스터미널로 가야 했다. 이날 구마모토 시내에서 땀이 범벅이 되도록 뛰어다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으아~ 진짜 일본에서는 징하게 뛰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