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를 떠난 후 정치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이름도 복잡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여행을 시작했다. 첫 여행지는 두브로브니크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 후에 닿을 수 있는 모스타르(Mostar)였다.
버스터미널에서 정말 웃긴 일이 있었다. 어떤 아저씨가 자꾸 나보고 잠깐만 얘기하자고 하길래 그냥 무시하고 갔는데 알고 보니 내가 찾아가려는 호스텔 주인이었다. 이 아저씨는 하루 종일 그 이야기를 다른 여행자에게 말 하면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모스타르에서만 총 5일 지냈는데 그 중 초반에 만났던 친구들은 미국인 애슐리와 대만인 벤즌이었다. 애슐리는 세계를 돌고 있는 여행자였고, 벤즌은 10개월째 자전거로 여행하고 있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여행자였다.
호스텔 주인아저씨는 굉장히 친절했다. 원래 아침만 포함된 곳인데도 때로는 점심이나 저녁도 같이 먹자고 불렀으며, 작은 돈은 개의치 않는 호탕한 성격을 지녔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데 음식이 좀 많이 짜다는 정도?
애슐리가 아침에 혼자 어디론가 간 사이 벤즌과 나는 모스타르를 비롯해 블라가이를 여행했다.
모스타르에는 과거 유고 내전, 정확히 말하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전 당시 겪었던 참혹한 상황을 아직도 확인할 수 있다. 도시 곳곳에는 부서진 건물과 총알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날씨가 조금 흐려 아쉽지만 버스를 타고 모스타르 바깥에 위치한 블라가이에 갔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민족에 따라 종교관이 복잡한 편이다. 보스니아인으로 불리는 민족은 이슬람,, 크로아티아인은 카톨릭, 세르비아인은 정교회를 믿는 편이다. 모스타르는 현재 보스니아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 사원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이 이슬람 성지 역할을 하는 것인지 단체 관광객이 정말 많았다.
내부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누군가 강물을 떠서 마시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서 마셔봤다. 물 색깔이 초록빛에 가까워 꺼려지긴 했지만.
이슬람 신자가 아닌 이상 이곳을 찾는 이유는 동굴에서 나오는 초록빛깔의 강물이 어우러진 수도원을 보기 위함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다른 지역에 비해 그나마 모스타르는 관광객이 있는 편인데도 사람들이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친구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다가와 얼떨결에 사진을 찍게 되었다.
블라가이에서 모스타르 시내까지는 약 14km 떨어져있다. 일요일이라 돌아가는 버스가 3시간 뒤에 있어 나는 히치하이킹으로 돌아가자고 했고, 벤즌도 하다가 안 되면 걸어서 가면 된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마을을 빠져나가 천천히 걸으면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는데 운이 좋은지 15분 만에 성공했다.
저녁 때는 또 다른 여행자 미국인 네이트가 함께했다. 나를 보더니 대뜸 한국말로 "한국 사람이세요?"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7년 전부터 한국에서 지내고 있어 유창하진 않더라도 한국말을 약간은 할 줄 알았던 것이다.
주는 맥주 넙죽넙죽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게 여기선 일상이었다.
저녁에 잠깐 나가서 거리를 걸은 뒤 숙소로 돌아와 같이 와인을 마셨다.
다음날은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가뜩이나 추운데 비까지 와서 더 추워졌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애슐리는 오늘 두브로브니크로 꼭 떠나야 한다며 작별 인사를 했고, 벤즌은 잠깐 베오그라드에 다녀오겠다고 떠났다.
비도 오고, 너무 추워 안에만 있었는데 다른 여행자 한 명이 들어왔다. 우리는 낮부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고, 저녁엔 네이트와 같이 와인을 마시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 와중에도 단체 여행객은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부활절 기간이라 호스텔에 단체 여행객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대학생들로 구성된 무리였다. 이 친구들은 꼭 하루만 모스타르에 머물고 두브로브니크로 떠났는데, 이곳에서는 그저 술만 퍼마시는 것 같았다.
모스타르에서 5일간 한 것이라고는 그저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게 전부였다. 여전히 날씨는 추웠고, 다른 여행자는 다 떠났다.
밤에도 나와 걸었다. 모스타르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라면 이 다리인데 밤에는 한적한 편이다.
베오그라드에서 돌아온 벤즌은 짐을 챙겨 두브로브니크로 떠났다. 나는 자전거 여행자가 아니지만,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에게 항상 존경을 표한다. 페달을 밟고 여행하는 자에게 행운이 가득하기를! 그러고 보니 모스타르에서 만난 여행자 대부분은 두브로브니크로 향하고 있었고, 나만 사라예보로 갈 예정이었다.
5일째 되는 날은 드디어 날씨가 맑아졌다. 심지어 따뜻할 정도까지 기온이 올라갔다.
다리 중심으로 엄청나게 많은 상점이 오랜만에 활기가 가득했는데 내가 전혀 다른 동네에 왔는가 싶을 정도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전 당시 부서졌던 다리는 현재 복원돼 여전히 '올드 브릿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아름다운 다리와 거리를 바라보면 여전히 종교와 민족갈등으로 언제 내전이 벌어질지 모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현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호스텔로 돌아오니 한국인 여행자가 있어 마치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난 것처럼 얘기하면서 모스타르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사라예보로 이동할 때는 히치하이킹을 했다. 총 3번의 차를 얻어 탄 후 사라예보에 도착했는데 그 중 첫 번째 차는 50분간 기다린 후 탈 수 있었다. 이 친구는 고작 10km만 태워줄 수 있다고 했으나 자신도 히치하이커라면서 사라예보에 사는 이탈리아인을 소개시켜줬고, 그곳에서 나를 묵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 다음에 얻어 탄 차는 현지인으로 영어로 의사소통은 거의 할 수 없었다. 이 아저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 콘지크(Konjic)까지 태워줬다.
다만 도시 중심부에 내려줬기에 나는 걸어서 도시 밖으로 향했다. 히치하이킹을 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가 나올 때까지 걸었는데 언덕을 지나 좁은 공터가 보여 여기서 다시 손을 들었다.
5분도 되지 않아 한 대의 차량이 급하게 멈춰 섰다. 재빨리 달려가 보니 사라예보행이었다. 차에 올라타고 난 후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불가리아인 크리스와 프랑스인 지나스는 부활절 휴가를 이용해 사라예보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사라예보에 도착한 뒤에는 나중에 불가리아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며 헤어졌다.
원래는 호스텔로 갈 예정이었는데 우연찮게 만난 히치하이커의 도움으로 정말로 이탈리아인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열쇠를 받고는 너무 배고파서 곧바로 사라예보 거리를 나섰다. 그리고 늦은 저녁에는 모스타르에서 만났던 한국인 태환이와 다시 만나 잠깐 맥주 한 잔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는데, 다시 겨울이 온 것처럼 정말 추웠다.
다음날에는 워킹투어를 참가했다. 사라예보에 이렇게 많은 관광객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워킹투어에 참여했는데 너무 사람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가이드의 목소리가 작아서 그런지 너무 피곤했다.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워킹투어였다.
그나마 워킹투어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바닥에 있는 빨간 점의 정체를 알게 되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이 나라의 사람들은 바닥에 수많은 빨간 점을 남겼고, 덕분에 언제든지 기억할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고 한다.
사라예보 올드타운 중심에 있던 카톨릭 교회지만 이 지역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보였다.
단순히 외형만으로는 모스타르에 있던 다리와 비교할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굉장히 중요한 다리다. 라틴다리라고 불리는 이 다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암살당했고, 이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라예보만 이슬람 사원이 180개는 있다고 한다.
정말 너무 배고파서 미칠 것 같아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다. 메뉴는 발칸지역에서 매번 먹는 체바피 밖에 없어 또 먹게 되었다.
사라예보 올드타운의 분위기는 참 묘했다. 뭔가 여러 가지 문화가 뒤섞여 있다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과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서 그런지 터키의 문화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사실 사라예보의 분위기는 날씨 탓인지 몰라도 그리 밝지 않았다. 나름 수도인데 깨끗한 건물은 거의 볼 수 없었고, 트램이나 버스도 무지하게 낡아 보였다. 그나마 올드타운은 상점도 많고, 사람도 많아 번화가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리 보스니아 무슬림이 개방적이라고는 해도 '프리허그'를 하는 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아니, 그것보다 사방에 이슬람 사원으로 가득한 거리에서 '프리허그'를 한다는 게 독특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들은 보스니아인이 아닌 세르비아인이나 크로아티아인일 가능성이 더 높긴 하다.
사라예보는 추웠지만 그렇다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빨리 떠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크로아티아에서 만났던 원석이형이 베오그라드에서 만나자고 해서 버스를 타고 곧장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향했다. 버스터미널이 시내에서 굉장히 멀었는데(사라예보에는 버스터미널이 두 군데 있다) 만약 호스텔에 묵고 있다면 셔틀버스를 이용해 바로 베오그라드로 갈 수 있다고 한다. 가격은 별로 차이 안 나지만 훨씬 빨리 갈 수 있다.
버스를 타고 가면 산 위에서 사라예보 도심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아직까지 추운 이유는 창밖을 보면 알 수 있다. 해가 쨍쨍한데도 아직까지 상당히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사라예보에서 베오그라드까지는 5시간이면 될 줄 알았는데 무려 8시간이나 걸렸다. 모처럼 오랜만에 장거리 버스를 타니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대체 난 러시아에서 기차를 어떻게 7일이나 탔는지 모르겠다.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자마자 원석이형과 재회를 했고, 같은 숙소에 있던 미영누나와도 만났다. 관광지 둘러보기 그런 거 없었고, 우리는 저녁에 KFC에서 치킨을 사서 베오그라드 성벽 근처에서 '치맥'을 했다.
다음날에는 낮술로 하루를 시작했다.
사라예보에 있다가 베오그라드에 오니 날씨가 이렇게 좋을 수 없었다.
공원으로 꽃으로 풍성해졌고, 사람들은 햇살을 맞으며 나들이 즐기는데 여념이 없다. 그만큼 베오그라드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사실 난 세르비아를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나라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과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세르비아는 가장 큰 중심축이었고, 연방에서 탈퇴하는 나라가 있을 때마다 무력 사용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물론 크로아티아도 자유롭지 못하지만 세르비아는 특히 민간인 학살이나 강간 등 전쟁 범죄를 많이 일으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행하기 상당히 좋고, 사람들도 무척 친절했다.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진짜 봄이 온 것 같다.
전날 어두워서 혹은 치킨을 먹느라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성벽 주변을 걸었다.
따뜻한 날씨를 마음껏 즐기고, 산책하니 정말 좋았다.
저녁엔 보헤미안 거리로 갔다. 베오그라드에서 괜찮은 카페와 식당이 밀집한 곳으로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싸지만 한 번쯤은 가볼만 하다. 특이한 게 있다면 거의 대부분의 식당에서 라이브 연주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원하는 건 손님들이 악기에 꽂아주는 팁으로, 만약 팁을 많이 주면 오래 머물지만 적게 주면 가차 없이 자리를 떠난다.
미영누나가 자그레브로 돌아간다는 걸 꼬셔서 베오그라드에 하루 더 머물게 만들었다. 그런 후 우리는 노비사드 당일치기 여행을 위해 기차에 올라탔다.
노비사드까지는 2시간 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부터 찾아나섰다.
베오그라드에는 절대 하루 더 머물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던 미영누나는 이런 약속을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하루 더 있게 된다면 밥을 사겠다고 했는데 그게 현실로 벌어졌다. 아무튼 우리는 어느 식당에 들어갔고, 여러 종류의 음식을 주문했다. 항상 감자탕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저 양고기 스튜는 놀랍게도 감자탕 맛이 났다.
중심지엔 노비사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이 있다.
슬로베니아부터 그랬지만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은 거리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맥주를 마시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노비사드 역시 날씨가 맑아 걷기 정말 좋았다.
시내를 돌아본 후 노비사드 성벽이 있는 언덕을 향해 이동했다.
디뉴브 강을 따라 형성된 도심지의 풍경이 나쁘지 않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으니 기분도 좋아졌고, 모처럼 동행자가 생겨 함께 여행하니 나들이하는 것 같았다.
정상에 올라오니 역시 카페와 식당이 가득했고, 바쁘게 움직일 이유가 없던 우리는 또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때웠다.
2시간 정도 노닥거리다가 베오그라드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오그라드행 기차를 탔을 때는 입석이었지만 미영누나랑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하고, 창밖의 일상적인 풍경을 바라보느라 2시간의 여정이 지루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에는 남자인 나와 원석이형이 밥을 짓고, 고기를 굽고, 국을 끓였다. 물론 설거지는 미영누나의 몫이었지만.
다음날 미영누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그레브로 떠났고, 나는 혼자 워킹투어를 참가했다. 굉장히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여러 체험을 하게 해줘서 다른 도시보다 덜 지루한 편이었다.
워킹투어를 하다가 막판에 잠깐 대화를 나누었던 리투아니아인과 미국인과는 점심도 같이 먹고 헤어졌다.
베오그라드를 떠나 도착한 곳은 세르비아의 남부 도시 니슈(영어로는 니시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니시와 니수의 중간 발음으로 불리는 것 같다)였다. 난 코소보로 갈 예정이었고, 원석이형은 불가리아로 갈 예정이라 니슈로 갈 때도 함께 움직였다.
베오그라드나 노비사드도 아시아 여행자를 보면 무척 신기해하긴 했지만 니슈는 특히 더 심했다. 대부분 중국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아무튼 니슈는 세르비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였으나 동네 자체 분위기는 다른 도시와 비교 대상이 되질 않는다. 대신 물가는 매우 싸서 좋았다.
팝콘 한 주먹을 입에 넣으며 시내를 걸었다.
니슈에도 성벽이 있는데 베오그라드나 노비사드에 비해 관리가 안 되는 것인지 그냥 공터나 다름없었다.
중심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평화롭고 조용한 동네였다.
저녁은 뭘 먹을까 고민하던 도중 길에서 한국인 주재원 분들을 만났다. 이 분들은 어떻게 여기를 여행하고 있냐며 오히려 더 놀라셨다. 어찌하다 보니 자리에 함께해 저녁을 함께 먹었는데 이것저것 시켜주셔서 정말 배불렀다. 2차로 맥주 한 잔을 더 마신 후 헤어지기 직전에는 내일 점심을 먹으러 기숙사로 오라고 초대해주셨다. 다음날 기숙사까지 걸어가 정말 오랜만에 떡국을 먹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인지 니슈에 있을 때 정말 웃긴 일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미영누나의 컴백이었다. 자그레브에서 멍하니 있다가 비행기를 놓친 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결국 우리를 만나러 니슈로 온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비행기 표를 찢어버리라고 했는데 말이 씨가 되었나보다.
저녁을 함께 먹으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 누나와는 달리 우리는 뜻밖의 재회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와인을 사다가 숙소에서 환영파티를 했다.
니슈 근처에 온천이 있다고 하길래 버스 타고 찾아갔는데 정말 허무하게도 우리가 기대한 그런 온천이 아니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꿈이 산산조각난 후 또 낮술로 하루를 시작했다.
지금 내가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동네 마실 나온 것인지 헷갈리는 순간이다.
니슈로 돌아가기 직전에 관광객 모드로 스컬타워(해골탑)을 보러 갔다. 나름 니슈 내에서 가장 큰 볼거리로 생각하고 찾아갔으나 실제로 해골탑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의미를 알게 되자 150디나르가 아깝지 않았다. 이 탑은 오스만 제국이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말인 즉슨 벽에 박혀 있는 해골은 진짜 사람의 머리였던 것이다.
학교에서 단체로 해골탑을 보러 온 것인지 마침 아이들이 우르르 나왔다. 아이들에겐 오스만 제국이나 해골탑보다도 관심 있는 건 잡상인의 장난감이겠지만.
숙소는 중심지와 조금 떨어져 있지만 시장도 있고, 가게도 많아 이것저것 공수하기는 무척 편했다.
아주 잠깐이나마 니슈에서 관광객 모드가 되어본다.
이제는 정말 헤어짐을 실감했다. 일주일간 함께했던 미영누나와 원석이형은 소피아로 떠났고 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원래 나도 다음날 바로 코소보로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카우치서핑 호스트가 답신을 줘서 니슈에서 3일 더 머물게 되었다.
아마 그냥 떠났으면 몰랐을 이 공원은 새로 지은 정교회 교회가 가운데 위치해 있고, 저렴한 카페와 식당이 주변에 가득했다.
호스트 보얀은 굉장히 말이 많은 편이었다. 사실 친절해서 좋긴 한데 너무 과도한 친절은 가끔 부담스러웠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다고 했고, 손수 저녁도 매번 차려주는 괜찮은 호스트였다.
날씨가 다시 좋아져 니슈를 다시 걸었다. 백발의 할아버지 네 분이 앉아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추모물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개의 주먹을 보기 위해 공원을 다시 올라갔는데 생각보다 크게 감흥이 없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버스터미널 옆의 시장도 잠깐 구경했다. 역시 관광객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다들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사람 구경을 하다가 보얀의 집으로 돌아갔다.
보얀의 집에는 과거 유고슬라비아 시대에 쓰던 지폐가 있었다.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에 비해 숫자가 많은 편이지만 이 지폐는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를 떠올리게 한다.
20억이나 500억 디나르짜리 지폐를 보면서 이게 현재 세르비아 화폐 가치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을 해본다.
나는 1,000원을 선물로 줬고, 보얀은 나에게 50,000,000,000디나르를 선물로 줬다.
보얀의 집을 나서기 직전에 다른 카우치서퍼와 함께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곧장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난 코소보로 가는 차량이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돼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는데 이곳 버스 시스템이 굉장히 이상했다. 당연히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아 버스터미널에서는 승차권을 살 수 없었고, 대신 버스터미널 입장권을 사야 했다. 그런 후 승차권은 프리슈티나행 버스 기사에게 직접 구입했다.
버스를 타고 2시간이 지나니 코소보 국경에 도착했다. 코소보 입국 도장이 없어 한참을 찾았는데 맨 앞에 있는 추가기재란에 찍혀 있었다.
마침내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영어로는 프리스티나)에 도착했다. 코소보의 미국 사랑을 사랑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 거리의 이름은 빌 클린턴 그리고 뒤에 있는 동상이 바로 빌 클린턴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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