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행 페리를 찾아 이스켄데룬까지 왔는데 아무런 소득도 없이 떠나야 했다. 떠나는 날까지도 미련이 계속해서 남았으나 미국인 친구 다니엘과 카이로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기로 결심했다. 비행기는 근처 대도시가 아닌 키프로스(사이프러스)에서 타는 게 좋아 보였다.
떠나는 날 새벽에는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졌다. 오후가 되기 전 배낭을 메고 걷는 도중 다시 폭우가 쏟아져 비를 잠깐 피했는데 가게에서 공짜로 차이를 줬다. 역시 터키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좀처럼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샐러드까지 나오길래 재차 나는 샌드위치만 시켰다고 말했더니 그냥 나오는 거라고 했다. 계산을 해보니 정말로 7리라(약 2800원)밖에 받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했다. 이스켄데룬 버스터미널로 가서 메르신으로 간다고 물었는데 버스 회사마다 전부 좌석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 있을 때 어느 한 사람이 나를 붙잡고 막 도착한 버스 앞으로 데리고 가서 도와줬는데 그 버스 역시 좌석이 없었다. 그러나 버스 승무원은 꼭 타야 한다면 좌석이 아닌 다른 곳에 태워줄 수 있다고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궁금했는데 버스에 타고나서 알게 되었다.
버스 뒷문 바로 옆에는 비밀문이 하나 있었다. 매트리스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장거리 이동할 때 기사 혹은 승무원이 교대로 쉬는 공간인가 보다. 비행기나 기차에 이런 공간이 있는 건 봤어도 버스는 처음이었다. 2시간 가량은 누워서 편하게 갔고 나머지 시간은 좌석이 남아 앉아서 갔다.
메르신에 도착해 타슈츄로 이동하는 돌무쉬로 갈아탔다.
그렇게 지루하지 않은 이동이 끝나고 타슈츄에 도착했다. 이 작은 마을에 벌써 3번째다. 레바논을 갈 때 여기서 페리를 탔고, 레바논에서 터키로 돌아올 때 여기로 돌아왔고, 다시 나는 키프로스(사이프러스)로 가기 위해 왔다.
페리 티켓을 구입하려고 할 때 조금 어이가 없었다. 분명 2주 전에 사이프러스 기르네(키레니아)까지 얼마냐고 물었을 때는 90리라였는데 거의 2배 가까운 170리라라고 해서 가격이 맞냐고 계속 물었다. 페리 가격은 원래 정해져 있지만 당일에 구입하는데다가,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몰려 비싸진 거라 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170리라(15리라는 항구세)를 냈다.
예전부터 키프로스(사이프러스)를 가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간다.
페리는 터키에서 레바논으로 갈 때와 완전히 같았으며 침대가 없어 밤이 되면 역시 사람들은 바닥에서 잠을 잔다.
생각보다 훨씬 길었던 항해 15시간이 끝나고 기르네에 도착했다. 키프로스는 북쪽은 터키계의 미승인국 북키프로스가 남쪽은 그리스계인 키프로스로 오래 전부터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는 상태다. 북키프로스는 세계에서 터키만 인정하는 국가이지만 사실상 정식국가인 키프로스의 힘이 닿지 않은 독립국이다. 때문에 북쪽의 항구 도시 기르네는 그리스식 ‘키레니아’가 아닌 터키식으로 부르는 편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북키프로스는 4번째 미승인국 여행국이었다.
기르네에 도착하자마자 놀란 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이렇게 관광지일 줄 전혀 기대를 하지 않은 탓에 비싼 물가와 더불어 많은 관광객을 보고 적잖아 놀랐다.
올드타운의 좁은 골목은 굉장히 예뻤다.
배낭을 메고 열심히 걷다 겨우 찾은 싸지 않은 싸구려 숙소에서 체크인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터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조금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날씨가 더워진 느낌이다.
여행자가 많은 곳이라 인포메이션 센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커다란 지도도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정식 국가인 남쪽의 키프로스는 오히려 여행자를 위한 안내가 미흡해 보였다.
올드타운이 작긴 해도 이렇게 서양 여행자가 많은 줄 몰랐다. 어디에서나 들리는 영국식 영어로 보아 특히 영국인이 많은 것 같았다. 사실 여행하면서 영국인을 많이 만나긴 해도 이 나라에 유난히 많은 까닭은 과거 키프로스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난 영국 식민지였다는 걸 도착하마자 알게 되었는데 그건 다름아닌 차의 운전방향, 그리고 전기 플러그가 영국식이기 때문이다.
몸은 피곤했지만 가볍게 동네를 둘러본 후 기르네 성으로 향했다.
북키프로스 어디를 가도 터키 국기는 항상 같이 걸려 있다. 북키프로스 국기는 바탕이 하얀색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터키 국기와 거의 비슷하다.
성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사실 성 자체의 볼거리가 많다기 보다는 높은 곳에 올라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게 전부다. 시원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파란 바다와 하늘 덕분에 무척 좋았다.
사진 찍기 딱 좋다.
바닥이 보일 정도로 바다가 깨끗했다.
성 내에는 몇 개의 박물관이 있어 가볍게 둘러보고 나왔다.
북키프로스에 가기 전엔 섣부르게 그리 깨끗하지 못할 거라는 추측을 했다. 키프로스의 경우 남쪽은 고소득에 유럽연합까지 가입해 북쪽은 상대적으로 빈곤할 거라는 섣부른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터키의 경제력이 많이 올라간 것도 있고 터키라고 해서 지저분한 동네를 본 적도 거의 없었으니 내 예상이 틀린 게 당연했지만 아무래도 기존에 내가 여행했던 ‘미승인국’의 이미지만 보고 갔기 때문인 것 같다.
다만 너무 관광지화되어 오래 머물만한 곳은 아니었다.
밤에는 야경이 보이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항구 그러니까 배가 가득 있는 곳이 아니라 그리 비싸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뒤에 혼자 카페에 가서 맥주를 한 잔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너무 피곤해 일찍 잤다. 그러나 밤이 되자 숙소는 반쯤 클럽으로 변해있었고, 시끄럽게 음악을 틀었다. 나는 이미 깊이 잠든 뒤라 신경 쓸 생각도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지만 나중에 들어온 서양 여자는 격하게 화를 내며 따졌다. 다음날 우리 방에 붙어 있는 ‘조용히 해주세요’ 종이를 발견하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음날 영국인 로빈과 수다를 떨다가 같이 아침을 먹으러 갔다. 장기 여행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한국의 다른 문화에 대해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아직 22살로 어린 친구였다. 그러나 같이 마셨던 커피값을 쿨하게 계산했다. 기르네에서 하루 정도 더 있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난 수도 니코시아로 이동했다.
남북이 나뉘어져 있는 키프로스는 수도 니코시아도 마찬가지다. 무슨 말이냐면 수도 역시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어 북쪽은 북키프로스, 남쪽은 키프로스의 영토다. 심지어 원의 형태로 성벽이 남아있는 올드타운도 반으로 갈라져 있다. 여태까지 많은 나라를 가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굉장히 신기했다. 과거에는 키프로스에서 북키프로스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북키프로스를 먼저 입국한 여행자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혀 상관 없다.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다면 유럽연합의 키프로스를 아무런 제한 없이 출입할 수 있다.
먹을 것을 달라고 기다리는 고양이 떼, 심지어 어떤 고양이는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내 다리를 툭툭 쳤다.
날씨가 조금 흐리긴 했지만 북키프로스의 니코시아도 여행자는 많았다.
올드타운 내에는 키프로스로 갈 수 있는 체크포인트가 딱 한 군데 있다. 시장 근처에 있고 표지판도 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안탈리아에서 봤던 우산이 있던 거리, 여기에도 있다.
북니코시아에 셀리미예 모스크라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과거 교회였다가 모스크로 변경한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셀리미예 모스크의 기둥과 내부구조를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체크포인트로 가서 국경을 넘었다. 국경은 정말 많이 넘어봤지만 도시 내에 있는 국경을 넘는 건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더구나 국경 넘기는 다른 곳에 비해 아주 간단했다.
국경을 넘자마자 보이는 건 ‘평화’ 글자 아래 있던 벤치.
남쪽으로 내려오자 정말 완전히 다른 나라의 모습이 펼쳐졌다. 터키어에서 그리스어로, 리라에서 유로로, 이슬람에서 정교회로, 터키 국기에서 그리스 국기로 모든 게 바뀌었다.
그러나 쇼핑 거리를 벗어나자 급격하게 황량해 보였다. 오히려 북키프로스쪽이 더 사람 사는 곳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리스 아테네에 있을 때 구석진 골목을 걷던 그런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북키프로스에서는 여행자를 위한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기가 무척 쉬웠는데 반해 키프로스에서는 구석진 곳에 있어 눈에 띄지 않았다.
국경선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이런 식으로 막혀 있다.
키프로스는 그리스계가 살고 있어 그리스 국기가 항상 같이 걸려 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EU에 가입해 EU국기도 많이 보인다. 지리적인 위치로 따지자면 중동에 가까운데 단지 그리스계가 산다는 이유로 EU가입이 승인된 모양이다.
키프로스 물가가 전혀 싸지 않아(남북 모두) 키프로스쪽에 있던 유스호스텔(10달러)을 찾아갔으나 방이 없다는 말에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키프로스를 비롯해 다시 국경을 넘어 북키프로스로 돌아와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겨우 체크인을 했다.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가장 싼 곳이었다. 물론 다른 나라에 비하면 전혀 싸지 않았지만.
분명 낮에는 북키프로스도 관광지다워 사람도 많았지만 밤이 되자, 정확히 말하면 저녁 8시가 되자 조용해졌다.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고, 노란 불빛만이 거리를 밝혔다.
겨우 맥주 마실만한 곳을 하나 찾았다. 북키프로스에서 맥주 구하기는 정말 쉬웠지만 늦은 밤까지 부어라 마시는 건 조금 어려웠다.
다음날 만사가 귀찮아 계속 누워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체크포인트를 넘어 키프로스로 이동했다. 여권만 제시하는 것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국경을 넘어다녔다.
키프로스는 정교회를 믿고 있어 종교적으로도 남북이 큰 차이를 보인다. 아, 또 하나 큰 차이점이라면 체크포인트만 넘으면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다. 메뉴판을 보다가 돼지고기가 있어 깜짝 놀랐다.
간혹 나처럼 커다란 배낭을 메고 이동하는 배낭여행자를 만나곤 했다. 물론 배낭여행자보다는 휴양을 즐기러 오는 중년부부가 많이 찾는 곳이긴 하지만, 키프로스에 이렇게 여행자가 많을 줄 전혀 몰랐다.
북키프로스로 돌아와 터키식 커피를 마셨다.
저녁에는 다시 체크포인트를 통과해 키프로스쪽에서 저녁을 먹었다. 확실히 밤이 되면 남쪽은 북적거린다.
저녁은 아르메니아 식당이라는 곳에서 먹었는데 가격이 고작 3유로로 저렴한데 굉장히 풍성했다. 아르메니아를 여행했을 때 이런 음식을 먹었던가, 아니 이건 그냥 포크찹이 아니던가, 이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쨌거나 싸고 맛있으면 됐다.
다음날 난 또 다시 체크포인트를 넘어 남쪽의 도시 리마솔로 향했다. 버스를 타기 직전, 옆에 있던 여자가 지금 현금이 없어서 그러는데 도착하면 ATM에서 뽑아주겠다며 5유로만 빌려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렇게 해서 만난 캐스틴과 리마솔로 같이 가는 2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다.
리마솔에 도착한 이후 ATM을 찾아 다니며 인출을 해봤는데 캐스틴의 카드가 문제였는지 모두 거부됐다. 그러다 어느 식당에서 카드로 결제가 되길래 늦은 점심을 먹는 것으로 돈을 돌려 받았다.
캐스틴은 오스트리아인으로 키프로스에 교환학생으로 왔다고 했다. 니코시아에 온지도 이제 2주차 밖에 되지 않아 시간이 남을 때마다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리마솔은 그냥 당일치기로 왔다. 그런데 우리는 ATM을 찾느라 그리고 늦은 점심을 먹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캐스틴은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다.
니코시아로 돌아가는 캐스틴을 배웅하러 한참을 걸었다. 딱 하루 만난 사이지만 서로를 안으며 “또 보자!”라는 여행자의 의식과도 같은 말로 작별을 했다.
유럽연합, 키프로스, 그리스 국기가 함께 걸려 있다.
다음날 나는 공항으로 향했다. 정말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공항에 갔던 때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아무래도 지난 1년간 단 한 번도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여행했으니, 또 레바논과 터키에서 그렇게 이집트행 페리를 찾아보려 하다가 시간과 돈을 허비했으니 아쉬움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숙소에서부터 만나 같이 공항에 갔던 미국인 조슈아와 키프로스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했다. 조슈아는 내 여행 이야기를 듣더니 무척 흥미로워했다. 조슈아는 요르단으로 나는 이집트로 떠났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공항이 굉장히 낯설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쉬움 마음을 가득 안고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이제 이집트다, 그리고 아프리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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