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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는 꽤 오래 지냈다. 아무래도 레바논이 작은 나라라 베이루트를 거점으로 삼고 당일치기로 다른 도시를 여행하기는 어렵지 않은 편이었다.


트리폴리에서 함께 지냈던 스콧과 베이루트에서 재회했다. 스콧을 만났던 곳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 거리. 이곳은 깔끔한 펍과 카페가 굉장히 많아 내가 머물고 있던 시끄럽고 정신 없는 다우라(Dawra 혹은 Daoura)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물론 여기는 굉장히 비싼 곳이 많아 아무데나 섣불리 들어갈 수 없었는데 다행히 대부분의 카페는 해피아워를 운영하고 있어 8시 전까지 맥주가 매우 싸다. 분위기는 대부분 괜찮은 편이지만 굳이 한 군데를 꼽자면 ‘라디오 베이루트’다. 아무래도 해피아워일 때 맥주가 3000파운드였고 에스프레소 커피도 2000파운드로 가격이 가장 저렴해서다.


스콧과 ‘라디오 베이루트’에서 맥주를 한 병 마신 후 곧바로 머물고 있는 친구네 집으로 갔다. 시리아인과 영국인이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갑자기 초대되었지만 그들이 해준 맛있는 저녁도 먹고 맥주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베이루트에 있는 동안 날씨는 여전히 무지하게 더웠다. 주르륵 흐르는 땀을 닦으면 손이 그대로 젖을 정도로 땀을 많이 흘렸다. 점심은 항상 레바논의 샌드위치 샤와르마(Shawarma)로 해결했다.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가게에 코카콜라가 보여 얼른 집었다. 신기한 물건을 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레바논에서는 대부분 펩시콜라만 취급해 코카콜라 보기가 힘들다.


다음날에도 아르메니아 거리를 다시 찾았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다리는 전부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한 색상이다.


원래 약속이 있어서 아르메니아 거리에 갔는데 그 약속이 깨지는 바람에 저녁에는 혼자 맥주를 마셨다.


돌아가는 길에는 큰 도로에서 밴을 탔다. 참고로 레바논에서는 밴과 서비스가 주 교통수단이다. 밴(1000파운드이지만 거리가 멀면 2000파운드)은 버스 역할을 하고 있고 서비스(보통 2000파운드이지만 거리가 멀면 역시 요금을 더 낸다)는 택시와 비슷하지만 일정한 구간까지 합승해서 이동하는 교통수단이다. 내가 있던 곳에서는 모든 밴이 다우라로 향하기 때문에 아무거나 잡아타도 된다.


다우라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항상 이 근처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한 승객들과 밴이 뒤섞여 복잡했다.


내가 여행하던 시기는 베이루트에서 쓰레기 대란으로 한참 시끄러운 때였다. 도시 곳곳에는 쓰레기로 가득했을 뿐만 아니라 시위를 막기 위해 강제적으로 정부가 거리를 통제하고 있었다.


대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를 태우는 장면도 보게 됐다. 베이루트 해안을 따라 형성된 큰 도로인데 여기에서 쓰레기를 태워 안개가 낀 것처럼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중동의 파리’라 불리는 베이루트, 프랑스의 식민지 시기로 인해 프랑스 문화나 건물이 많이 남아 있어 그렇게 부르는 것 같지만 나에겐 파리의 물가처럼 중동에서 비싼 곳이라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닌가라는 쓸데 없는 추측을 했다.


어지럽게 얽혀 있는 전깃줄이 안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리곰탕면과 햇반을 주신 분께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한다. 리발의 집에서 4일간 지낸 후 다른 호스트를 구하지도 못한 것도 있지만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더워 에어컨이 있는 호스텔로 이동했다. 하루 20달러나 하는 비싼 호스텔인데 그리 깨끗하지는 않았다. 그저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이 있다는 것과 에어컨이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다만 레바논 여행 초기, 그러니까 10일까지는 카우치서핑으로 지내 하루에 만원 조금 넘길 정도로 돈을 정말 적게 썼는데 그 이후부터는 돈을 정말 많이 썼다. 호스텔 가격은 물론이고 베이루트의 물가가 비싸 도저히 돈을 아낄 방법이 없었다.


인연은 이렇게도 이어질 수 있다. 10개월 전 아르메니아에서 만났던 빅토리아의 동생 나이리와 남자친구 호빅을 만났다. 우리는 한참 수다를 떨다 헤어졌는데 비록 2병이긴 해도 그들이 내 맥주값을 계산했다.


다음날 아침, 하늘은 짙은 갈색으로 뿌옇게 변해있었다. 누군가의 말로는 이라크로부터 불어온 모래폭풍 탓이라고 하는데, 당시 중동의 하늘은 거의 ‘인류 최후의 날’을 연상하게 할 만큼 심각했다. 아침에 숙소에서 인사를 하면서 알게 된 벨기에인 하셸과 세르비아인 미하일로와 트레킹을 위해 밖을 나갔다. 이런 날씨인데도 말이다.

 

가까운 거리인 줄 알고 그냥 따라 나섰는데 비블로스에 도착한 이후에도 한참 이동해야 했다. 다만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대중교통으로 가기 매우 힘들었던 곳이라 택시를 탔는데 하셸과 택시 기사와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레바논에서 정상적인 택시를 보기 힘든데 이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과는 달리 계속 말을 바꾸고 돈을 더 받으려고 해 하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고성을 지르고 달리는 차의 문을 열었다. 당시 상황을 모르던 나와 미하일로는 멀뚱멀뚱 지켜만 봐야 했다. 하셸은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 싸운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택시에서 내린 후 히치하이킹을 했다. 하셸은 히치하이킹이 처음이었지만 나와 미하일로는 많이 해봐서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자리에서 손을 올렸다.


생각보다 쉽게 차가 멈췄다. 작은 트럭이라고 할 수 있는 차의 앞좌석은 하셸이 타고 우리는 뒤에 탔다. 산 위를 달리고 있어 나름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날만큼은 예외였다. 모래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친구는 우리를 갈림길에서 내려줬다. 그러나 목적지인 타노우린(Tannourine)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았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근처에 군부대가 있어 살짝 놀랐지만 그 보다 더 놀라웠던 건 군부대 바로 옆에서 총을 꺼내 사냥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다시 히치하이킹으로 어렵지 않게 차를 탔다. 이 아저씨는 여행자가 반가웠는지 우리에게 멋진 곳이 있다며 중간에 내려서 보고 가자고 했다. 분명 계곡이 멋지긴 한 것 같은데 역시 모래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타노우린에 가서 트레킹까지 같이 했다. 멀리까지 온 것치고는 트레킹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근데 왜 이렇게 다들 총을 쏘는지, 사냥인 건 알고 있지만 총소리에 나와 미하일로는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짧은 트레킹을 마치고 마을로 내려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때마침 한국과 레바논 축구경기를 시작했다. 원래 이날 축구경기를 직접 보지는 않더라도 TV가 있는 펍에서 보려 했는데 트레킹이 늦어져 정말 외딴 곳에서 보게 됐다. 일부러 ‘빨간티’까지 입고 나왔는데.

 

돌아갈 때도 히치하이킹을 했다. 커다란 트럭이 우리 앞에 멈췄고 우리는 비블로스로 간다고 하자 뒤에 타라고 했다. 당연히 트럭 뒤는 편하지 않았지만 예상과 달리 베이루트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2시간 동안 모래로 가득한 바람을 마시면서.


사실상 베이루트에 호스텔이 한 군데라(비슷한 가격의 다른 숙소도 있지만 적어도 이름이 ‘호스텔’인 곳은 하나다)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를 만났다. 짧게 여행을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곳에서 교환학생 등으로 학교를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며칠간 베이루트의 하늘은 '지구 종말의 날'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셸이 제이타 그로토 여행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지만 난 따라가지 않았다. 사실 난 다음 목적지가 정해진 상태가 아니었다. 사이프러스(키프로스)로 갈지 아니면 이집트로 바로 갈지 알 수가 없었고, 더 큰 문제는 베이루트에서 출발하는 페리를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일단 직접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항구로 갔는데 입구의 군인들로부터 여행자를 위한 페리는 없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걸어서 시내까지 가봤다. 베이루트에서 며칠간 지냈지만 시내는 처음이었다.


모스크와 교회가 나란히 있는 신기한 장면을 보게 됐다.


시내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곳에 군인이 정말 많았는데, 그들은 주요 거리를 막고 있었다. 심지어 군대에서나 보던 철조망으로 아예 출입은 통제하기도 했다. 정말 의아했다. 나중에야 그게 시위를 막기 위한 방편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거리를 막아 버리는 건 좀 충격이었다.


레바논은 정부를 구성할 때 종교적인 갈등을 최소화하고자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동일한 비율로 유지하는데 그 역시 갈등이 봉합되기는커녕 점점 심화되고 있다. 레바논 독립 초기 기독교 마론파가 강세였지만 세월이 지나 이슬람교가 점차 강해지고 있어 상황은 많이 달라졌고, 무능한 정부는 대통령이 없는 체로 장기간 이어져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우리가 레바논을 바꾸자!’라는 구호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마침 기도시간이 끝나 무함마드 알리 아민 모스크에도 들어가봤다. 먼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날 반겼다. 이슬람교의 특성상 우상숭배는 철저하게 금하고 있어 어떤 모스크를 가도 성상이나 성화가 없는데, 대신 천장의 화려한 무늬나 거대한 샹들리에가 모스크의 웅장함을 표출하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 베이루트에 있는 동안 제대로 된 식당을 거의 못 갔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가격 때문이다. 특히 아르메니아 거리에는 도저히 말도 안 될 정도로 비싼 식당이 널려 있어 항상 샌드위치로 허기를 채웠는데 여기는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1만 파운드에다가 레바논 음식이라 완전 마음에 들었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고기와 치킨이 밥 위에 올려져 있고 이 위에 국처럼 보이는 것을 얹어 먹으면 된다. 채소의 향이 무척 강하지만 국밥을 먹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일반 가정집의 벽면이었지만 여기서도 내전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혼자 제이타 그로토(Jeita Grotto)를 향해 출발했다. 갈림길에서 쉽게 내려 서비스 택시를 탄 것까지는 좋았는데 내가 가려는 곳과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내려줬다. 여기가 제이타라며. 난 다시 돌아갔고 제이타 그로토로 가는 길에서는 히치하이킹을 했다.


레바논의 유명한 관광지인 제이타 그로토는 석회암 동굴을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이다. 입장권은 18,500파운드로 2군데의 동굴과 케이블카,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지만 사실 그리 높지도 않아 왜 케이블카가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대신 동굴로 들어가면 다른 차원에 떨어진 것처럼 환상적인 분위기에 취한다. 거대한 종유석과 버섯모양의 석순을 볼 수 있다. 아쉽게도 석회암 동굴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불가능했다.


동굴 하나를 보고 내려온 후 배가 고파 점심을 먹었다. 역시 콜라는 펩시다. 그나저나 항상 궁금했던 건, 왜 레바논에서 파는 캔은 전부 이런 모양인지 모르겠다. 아주 어렸을 때 이후 이런 모양의 캔따개는 정말 오랜만에 본다.


동굴이 하나인 줄만 알고 아쉬워했는데 아래쪽에 다른 동굴이 하나 더 있다. 이 동굴은 보트를 타고 이동하며 관람할 수 있는 곳이라 더욱 신비스러웠다.


제이타 그로토 앞의 택시 기사는 그냥 무시하고 걷다가 히치하이킹을 했다. 한참을 걸은 후 잡아탄 차는 고속도로 근처에서 내려줬고 난 그곳에서 밴을 타고 베이루트로 돌아왔다.


하셸이 레바논에서의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레바논 현지인의 생일파티에 따라갔다. 다양한 국적과 인종이 함께 한 자리였는데 대부분은 베이루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여행을 1년간 하고 있다는 말에 놀라던 독일인 사마라는 끊임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자리였지만 사마라와 레바논인 나빌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면 아르메니아 거리는 젊은 친구들로 가득 메워진다. 늦은 시각까지 술을 마시며 춤을 추는 곳이라 여느 다른 곳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숙소에서 만난 뉴질랜드인 마이크는 2군데의 한국을 모두 가봤다고 하는 여행자다. 우리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라 역시 북한을 여행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흥미롭다. 사진을 보여준다고 했지만 인터넷이 느려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레바논에서 인터넷 속도와 전기(수시로 정전이 된다)는 기대를 하면 안 된다.


레바논의 또 다른 유명한 관광지 발벡(현지인은 발벅이라고 발음하는 것 같았다)을 가기 위해 일단 콜라(Cola)를 찾아갔다. 처음 가는 곳이라 여러 번 헤매고, 군인의 안내도 받고, 내릴 곳을 놓쳐 다시 걸어 겨우 도착했다. 남쪽이나 동쪽의 다른 도시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여기로 와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밴을 탔지만 이 아저씨가 처음 말한 것과는 달리 중간 도시에서 아예 내려 다른 밴을 타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렇게 되면 돈을 또 내야 한다고 하니 5000파운드를 내면 다른 아저씨가 2000파운드를 받게 된다는 답변을 듣고서 줬는데, 갑자기 딴 소리를 한다. 내가 돈을 줬던 그 아저씨는 이미 떠나 난 돈을 받지 못했으니 발벡까지 가고 싶으면 3000파운드를 내라는 것이었다. 너무 황당했다. 이런 일에 적당히 넘어갈 수 없어, 계속 밴을 타라고 말해도 타지 않았다. 아예 안 탈 생각까지 했으나 2000파운드만 내고 타라는 꼬임에 억지로 탔다.


발벡에 도착하자마자 로마시대의 신전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로마가 얼마나 강력한 나라였는지 이 신전의 규모를 보면 가늠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로마 유적지는 다른 곳도 아니고 중동의 레바논에 있으니, 과연 대단하다.


그리스에서 봤던 아크로폴리스를 포함한 수많은 그리스 유적들. 그때는 분명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어쩐 일인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관광객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이곳에서(물론 내가 있던 시간에만 없었지만) 혼자서 돌을 밟으며 지나가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 기둥은 주피터 신전의 것으로 딱 6개만이 2000년 세월을 딛고 남아있다.


거대한 유적지를 혼자 거닐며 감상에 빠졌다.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주피터 신전의 기둥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스에서 봤던 로마 유적지가 훨씬 거대하지만 이곳이 더 감명 깊었다.


당일치기로 발벡을 온 것이라 이대로 베이루트로 돌아가기는 뭔가 좀 아쉬웠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번쩍이던 모스크로 향했다. 기존에 보던 모스크와는 많이 다르게 작은 타일과 아랍어로 벽면을 꾸몄다. 모스크 입구에는 총을 들고 있는 남자가 앉아 있어 살짝 놀랐지만, 레바논에서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은 워낙 많이 봐서(대부분 군인이지만) 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말이 통하지 않았음에도 가볍게 농담 따먹기 한 후 모스크로 들어갔다.


모스크의 내부도 역시 화려했다. 여기서 뭔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는데, 모스크 내부에는 유난히 무장을 한 남자의 사진이 여럿 보였다. 너무 궁금해서 다른 사람에게 물었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대강 듣기로는 이 남자들이 전부 헤즈볼라(이슬람 시아파계열의 무장단체로 서구권에서는 주로 테러단체로 지목되지만 레바논 내에서는 의석을 가지고 있는 정당)의 대원이었고, 이들은 시리아에서 싸우다 죽었다고 했다. 헤즈볼라에 대해 관심이 있어 몇 마디 나누고 아까 그 모스크 앞에서 총을 들고 있던 남자와 다시 농담을 주고 받은 뒤 뭔가 레바논의 깊숙한 현지 모습을 보고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리와 호빅과 다시 만나 레바논 남쪽을 여행했다. 먼저 레바논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인 사이다(시돈이라고도 부른다)로 갔다. 사이다에는 이슬람교 수니파가 80%이상으로 기독교인이 80%이상이었던 비블로스와는 정반대 성향의 도시라 할 수 있다.


사이다 성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가 제법 괜찮았다.


이 커플은 어찌나 알콩달콩한지,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사이다의 시장을 구경했다. 확실히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데다가 나이리와 호빅이 이것저것 설명을 해줘서 무척 재밌었다. 향신료의 냄새를 맡아보라고 하거나 말린 콩을 만져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무더운 날씨에 시장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점심 시간이 지나니 각 모스크에서 나오는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진다. 베이루트에서는 들리지 않았기에 이 기도 소리가 실로 오랜만이라 느껴졌다.


레바논이나 시리아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비누 박물관도 구경했다. 상당히 흥미로운 곳이었는데 입장료가 없는 무료라 놀랐다.


낯선 여행자를 신기해하는 현지인들의 반응은 언제나 정겹다.


시장과 연결된 올드타운의 구석구석을 돌아본 후 우리는 사이다를 떠났다.


다음 목적지는 오로지 물놀이하러 이동한 수르(티레라고도 부른다)였다. 바다가 깨끗한 편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현지인들의 해수욕장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점심으로 생선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바다에 들어가 파도에 몸을 맡겨 떠밀리며 시간을 보냈다.


레바논에서 체류 3주가 되었을 때 슬슬 앞으로의 일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IS와 내전의 영향으로 시리아는 위험한 나라로 변해 여행이 불가능했고,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적국이나 다름 없어 국경은 열려 있지 않았다. 오로지 육로 여행만 고집하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베이루트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페리가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절망적이었다. 이대로 비행기를 타야 하는가, 싶어 항공권 검색을 했고, 결국 비행기를 타고 이집트로 이동하자고 결심을 했었다. 그렇게 항공권을 알아 보던 중 터키에서 이집트로 가는 페리의 존재를 확인했고 난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남들이 보기엔 최악의 수에 몸을 던진 셈이다. 베이루트에서 비행기를 타면 고작 130달러밖에 하지 않는데, 1시간이면 카이로에 도착하는데, 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버스를 타고 여행의 출발지였던 트리폴리로 돌아갔다. 당일 페리를 알아 봤는데 무려 250달러라는 말에 한참을 망설였다. 분명 터키에서 레바논으로 올 때는 135달러였는데 이유는 몰라도 훨씬 비쌌다. 물론 이틀 뒤에 타면 200달러라고 했지만 여기서 이틀간 머무를 이유는 내게 없었다. 순간 비행기를 타지 않은 나 자신을 원망한 후 페리 티켓을 구입했다.


페리 출발 시간은 오후 10시(당연히 이 시간에 출발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허기도 채울 겸 배낭을 메고 거리를 걸었다. 그저 거리를 걸었을 뿐인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진을 찍어 보라며 손짓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독특한 기구로 레모네이드를 따라주며 맛을 보라고 권하던 아저씨와 감자튀김을 한 주먹 담아 나에게 권하던 식당 직원들까지 온갖 관심을 다 받았다.


트리폴리에서 4일간 지냈었는데 그때보다 더 좋아졌다.


여행을 하다 보면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과도한 관심을 받을 때가 있는데 트리폴리에서의 지나친 관심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사실 트리폴리는 현지인도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고 할 정도로 종교간 갈등이 남아있는 곳이다. 종교간 갈등이라고 하면 대게 이슬람교와 기독교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이슬람교의 수니파와 시아파 세력간의 다툼인데, 기독교의 카톨릭과 개신교 차이보다 훨씬 심한 탓에 이 두 종파의 다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심지어 금년 1월에도 트리폴리 시내에서 테러가 발생해 몇 명의 사망자가 있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런 트리폴리에서 여행자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너무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베이루트도 괜찮긴 했지만 저렴한 물가와 여행자에게 먼저 다가와 “웰컴 투 레바논!”이라고 건네는 그들 덕분에 트리폴리가 더 마음에 든다.


시간이 한참 남아 미나(항구 부근)에 있는 카페에 갔다. 트리폴리는 이슬람이 강한 도시라 술보다는 여러 종류의 음료를 판다. 예전 인도네시아를 여행할 때도 마셔봤던 화려한 색상의 무알콜 칵테일을 주문하고선 인터넷을 하면서 주구장창 시간을 때웠다. 저녁도 여기서 해결해 남은 레바논 돈을 전부 다 썼다.


대신 남은 돈이 한  푼도 없어 항구까지는 걸어갔다. 어두운 골목과 도로를 가로질러 걸을 때에도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항구로 뻗어있는 도로에 들어서자 더 어두웠다. 가로등은 있었으나 불이 켜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트리폴리 항구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레바논 여행의 마무리라고 할까?


역시 예상대로 페리를 타려는 사람은 유럽으로 가고 싶어하는 시리아인이 대부분이었다. 뉴스에서나 보던 시리아 난민사태,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아무래도 여행자는 나 혼자이다 보니 등장할 때부터 관심의 대상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10시에 탑승한 페리를 보니 최악이었다. 터키에서 레바논으로 올 때 탔던 페리보다 훨씬 작았을 뿐만 아니라 좁은 의자에 무려 3명이나 앉게 했다. 250달러나 주고 탄 페리가 이 정도 수준일 줄은 정말 몰랐다.


결국 잠을 잘 수 없어 매트리스를 꺼내 바닥에 깔고 잤다.

 

페리에는 나 이외에 다른 외국인이 3명 더 있었는데 이들은 ITN이라고 하는 영국방송국의 기자들이었다. 틈틈이 옆에서 시리아 난민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고 있어 나도 들을 수 있었다. 해외는 처음 나가본다는 친구와 그 옆의 친구는 유럽으로 가고 싶어했지만 정작 어디로 가고 싶냐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못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는 꿈이 뭐냐는 질문에 그저 아이가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은 시리아 내에서 전쟁이 없는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내전 상황이 좋아지지 않아 떠난다고 했다. 천진난만하게 뛰어 놀며 웃는 아이들과 다르게 어른들은 삶의 희망을 찾고자 하는 쓴웃음을 내비쳤다.

 

인터뷰를 마칠 때마다 영국인은 “굿럭!”이라는 말과 함께 악수를 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16시간의 지루한 여정이 끝나고 난 다시 터키로 돌아왔다. 나도 참 고지식하다.


저는 지금 세계여행 중에 있습니다. 이 글이 마음에 든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 및 응원(클릭)을 해주실 수 있습니다. 작은 도움이 현지에서 글을 쓰는데 큰 힘이 됩니다.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배낭여행자에게 커피 한 잔 사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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