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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로 돌아왔다. 새삼 반짝이는 불빛과 바쁘게 움직이는 차를 보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이 얼마나 화려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어색하지 않았다. 익숙해진 거리를 걷자 마치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오니 일주일 전과는 달리 한국인 여행자를 많이 만나게 되었다. 아무리 비수기라 할지라도 남미의 대표적인 도시이자, 관광지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여행자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한국인 여행자는 페루에서 시작해 브라질로 가는 루트를 택하기 때문에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꼭 들리게 된다. 아무튼 갑작스럽게 많아진 한국인 덕분에 오랜만에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게 되었다.

 

하루는 같은 방을 쓰던 여행자들로부터 레콜레타(Recoleta)를 같이 가지 않겠냐는 제안에 어딘지도 모른 채 따라갔다.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일주일도 넘게 지냈으면서 레콜레타 묘지를 가보지 않았던 것이다.

 

묘지가 관광지라니 뭔가 이상할 법도 한데, 그 이유를 들여다 보면 수긍이 간다. 레콜레타에는 아르헨티나의 유명 인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고, 독특한 건축물이 한데 어우러져 일종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밤이 되면 으스스할지 그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낮에는 여기가 묘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르헨티나가 사랑한 여인 에바 페론(Eva Peron)의 묘도 여기에 있다. 흔히 꼬마 에바라는 뜻의 ‘에비타’라는 별명이 더 유명한데 아주 잠깐의 연예인 생활로 인기를 얻은 그녀는 당시 노동부 장관 후안 페론과 결혼하게 되었고, 후에 후엔 페론이 대통령이 되면서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화려한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가난을 겪은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해 여러 정책과 구호를 하게 되어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되지만 33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물론 여기까지만 보면 에바 페론이 정말 아르헨티나 국민들로부터 국모대접을 받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실패한 정책으로 경제는 파탄이 났고, 은밀히 남편 후안 페론과 함께 독재를 하고자 했던 것으로 드러나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르헨티나가 사랑하는 여인답게 추모하는 사람이 많아 그녀의 묘 앞에는 항상 꽃이 가득하다.

 

레콜레타 묘지에 있는 무덤은 실제 사람이 사는 집처럼 꾸며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이곳에 묻힌다는 것은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 화려하고 성스러운 조각상이 무덤 주변에 있기 마련인데 긴 치마를 입고 있는 한 여인이 강아지와 함께 서있는 이 청동상을 보자 밤에는 조금 무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는 화려한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호스텔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푸에르자 브루타(Fuerza Bruta) 공연을 보러 갔다. 그동안 푸에르자 브루타를 보라고 여러 번 추천을 받았는데 사실 설명만 들어서는 어떤 공연인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콘서트도 아니고, 뮤지컬도 아니라고 하는데 누구도 어떤 공연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서커스에 가까울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오전에 미리 푸에르자 브루타 할인권을 구입해서 거의 반값인 130페소에 봤다.

 

그런데 막상 공연장으로 들어가니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까 의자도 없는 채로 사람들은 멀뚱멀뚱 서있어야 했는데 그때까지도 우리가 무엇을 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화려한 조명과 웅장한 북소리로 관객의 흥을 돋궜다.

 

공연은 정말로 서커스를 방불케 했다. 와이어를 이용해 공중에서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사방에서 물이나 종이조각이 떨어지는, 그야말로 관객을 정신 없게 만들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푸에르자 브루타는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을 깨는 공연으로 좌우, 위아래가 모두 무대였던 거다.

 

갑자기 가운데에 무대가 만들어지고 관객은 옆으로 비켜서서 관람하게 되었다. 여기서 무기력해 보이는 한 남자는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처럼 커다란 침대를 들고 계속 걷다 지쳐 잠든다. 잠시 후 그는 모든 것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는 듯 무작정 달리기 시작한다. 벽이 있어도 뚫고 달리는 역동적인 모습에 환호성이 터졌다.

 

가장 압권이었던 장면은 거대한 투명 수조가 공중에서 내려올 때였다. 관객들은 마치 수조가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것처럼 손을 들었는데 수조 안에 있는 미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영을 즐기는가 하면, 엎드려서 관객과 눈을 맞췄다.


미녀들이 몸을 던지며 크게 뛸 때마다 관객들은 혹시나 수조가 부서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괜한 걱정하면서도 한껏 달궈진 분위기에 신났다.

 

관객들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다. 곧바로 다른 무대가 설치되었고, 이번에는 공중에서 한 남자가 내려와 여자를 안고 올라갔다.

 

과연 많은 사람들이 푸에르자 브루타를 추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스페인어를 몰라도 전혀 문제 없었다. 어차피 뮤지컬처럼 어떤 주제가 명확한 것도 아니었고,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관객들과 춤을 추면서 신나게 공연을 마무리한다.

 

푸에르자 브루타는 가끔 세계 각지에 있는 도시에서 공연을 하기도 한다. 벽면에는 다른 나라에서 공연을 했던 포스터를 전시를 해놨는데 그 중에는 서울도 있다.

 

우루과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대체 어디를 가야 한단 말인가, 이런 고민만 반복하다 하루를 보냈다. 무계획적인 여행이 길어지다 보면 가끔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잊는 것 같다. 침대를 박차고 나와 이미 수십 번 걸었던 거리를 또 걸었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흐리멍덩한 하늘이 아닌 파란 하늘이 자리를 잡고 있어 걷기에도, 사진 찍기에도 좋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며칠간 있었음에도 국회의사당(Congreso)을 제대로 본 것 같지 않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중후한 멋이 있고, 거대하다. 역시 오래된 건축물이 가득한 부에노스아이레스답게 국회의사당도 지은지 100년을 훌쩍 넘겼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매우 큰 도시이기는 하나, 걸어서도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내친김에 마데로 항이 있는 신도시까지 걸었다. 비교적 최근에 개발이 되기 시작한 이곳은 확실히 다른 곳과는 달리 현대식 높은 빌딩이 올라가고 있다. 거리에는 세련된 카페와 식당이 가득하다. 항상 오래되고, 좁은 골목으로만 기억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런 장소도 있다.

 

같은 방을 쓰고 있던 제연형과 비호가 라 보까(La Boca)에 간다고 하길래 따라 나섰다. 나는 이미 가봤던 곳이었지만 날씨가 좋아 산책도 할 겸 커피를 마시러 갔다.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다른 곳에 비해 조금 비싸긴 해도 관광객으로 가득한 거리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모처럼 여유를 즐기는 것 같아 나름 괜찮았다.

 

예전에는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는데 라 보까에서 이 세 사람을 찾을 수 있다. 왼쪽부터 축구영웅 마라도나, 아르헨티나가 사랑한 여인 에바 페론, 탱고의 아버지 피아졸라다.

 

라 보까를 다녀온 뒤 산뗄모(San Telmo) 일요시장까지 따라갔다. 특별한 것도 없는데 한 번 다녀왔다는 이유로 아는 척을 하며 앞장섰다.

 

땅콩 볶는 아저씨는 아르헨티나나 우루과이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에 이끌려 하나 샀다.

 

어떤 행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산뗄모에서 숙소까지 돌아오는 도중 다들 알록달록하게 차려 입고 기차 놀이하는 것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다시 일주일을 보낸 나는 다음 목적지를 이과수 폭포로 정했다. 당장 남쪽의 파타고니아 지방으로 갈지, 서쪽의 칠레로 갈지 정하지 않더라도 일단 이과수 폭포부터 보자는 단순한 생각이 앞섰다. 마침 브라질로 올라가는 영진이와 함께 버스를 탔다. 물론 이과수까지 12시간이나 걸리는 장거리 이동이기는 하지만 아르헨티나 버스는 비싸도 너무 비샀다.

 

다음날 푸에르토 이과수에 비몽사몽인 채로 도착했다. 이과수 폭포를 보러 온 관광객으로 가득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조용했다. 비수기이긴 비수기인가 보다. 그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왔다고 날씨는 훨씬 따뜻했다.

 

푸에르토 이과수(Puerto Iguasu)에서 버스를 타면 쉽게 이과수 폭포에 갈 수 있다. 이과수 폭포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국경지대에 걸쳐 있는데 나이아가라 폭포와 빅토리아 폭포와 더불어 세계 3대 폭포라 불리기도 한다. 물론 세계 3대 폭포라는 게 어떤 권위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세계 3대 폭포라고 이름이 붙은 것도 아니지만 그만큼 규모나 수량이 압도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아르헨티나에서 볼 수 있는 이과수 폭포는 크게 3가지 길로 둘러볼 수 있는데 먼저 가운데에 있는 길을 따라 걸어봤다. 아직 폭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프리카를 여행할 때 짐바브웨와 잠비아에서 빅토리아 폭포를 본 적이 있어 막상 이과수 폭포를 보면 감흥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난 입이 절로 벌어지며 감탄했다.

 

이과수 폭포 주변을 걷다 보면 코아티(킨코너구리)라고 하는 귀엽고 호기심 많은 동물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코아티는 사람들 손에 들려 있는 먹을 것을 노리고 오히려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몰려오곤 한다. 아무리 귀엽다 해도 야생성을 위해, 혹은 달려드는 코아티의 발톱에 다칠 수도 있으니 이과수 국립공원에서는 절대 먹을 것을 주지 않도록 안내하고 있다.

 

점심으로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먹은 뒤 이과수 폭포의 아래쪽에 있는 길을 따라 걸어봤다. 이전에는 작은 폭포를 계속해서 봤다면 이번에는 이과수 폭포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수많은 폭포가 끊임 없이 물을 쏟아 내고 있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빅토리아 폭포를 여행할 때 마치 비가 오는 것처럼 산책로에 물이 쏟아져 온몸이 홀딱 젖었는데 이과수 폭포에도 역시 그런 구간이 있다. 폭포의 웅장함을 품고 있는 듯한 사진으로 담고 싶었는데 결과물은 비에 젖은 생쥐꼴이었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

 

보트투어는 이과수 폭포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폭포로 향하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긴 겨울에 해당하는 계절이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거의 비명만 지르다 끝났다.

 

선명한 무지개가 이과수 폭포에 걸쳐 있다.

 

두툼한 부리와 동그란 눈동자, 알록달록한 색상을 지닌 이 새를 본다면 누구라도 인형을 갖다 놓은 거라 생각할 것이다. 인형처럼 귀엽게 생긴 이 새는 브라질 국조인 투칸이라고 한다. 기념품 가게에서 투칸 인형을 본 적이 있었지만 설마 직접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르헨티나 이과수 폭포의 마지막 코스인 ‘악마의 목구멍(Garganta del Diablo)’으로 향했다. 대체 어떤 폭포이길래 악마의 목구멍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기대감이 절로 생겼다. 그러고 보니 빅토리아 폭포에도 ‘악마의 수영장’이 있었는데 어쩌면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함을 마주하게 되면 자연스레 천사가 아닌 악마가 떠오르나 보다.

 

괜히 악마의 목구멍이 아니었다. 정면뿐만 아니라 좌우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었다. 낙차가 상당해서 그런지 부서지는 폭포에 의해 바로 앞 폭포의 윤곽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어려울 정도였으며, 악마가 울부짖는 듯할 정도로 굉음이 울렸다.

 

우연히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과 악마의 목구멍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과수 폭포를 다 둘러보고 다시 푸에르토 이과수로 돌아왔다. 영진이는 브라질로 향했지만 나는 푸에르토 이과수에서 하루 더 머물면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국경이 만나는 지점을 가봤다. 당연히 세 나라가 맞닿은 지점이라 나름 이곳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파라나 강을 멍하니 바라보다 돌아왔다. 사실 이과수 폭포는 파라과이 영토였으나 삼국동맹전쟁에서 패해 국경선이 이곳으로 밀려났다. 파라과이는 전쟁으로 영토도 잃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도 잃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하루라도 시간을 내서 브라질에서도 이과수 폭포를 볼 걸 그랬나, 이런 아쉬움도 있지만 당시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본 이과수 폭포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 곧장 파라과이로 향했다.

 

푸에르토 이과수에서 버스를 타면 파라과이 국경도시 시우다드 델 에스테(Ciudad Del Este)에 쉽게 갈 수 있다. 다만 아르헨티나에서 바로 갈 수 없어 브라질을 거쳐 가느라 1시간이나 걸렸다. 국경에 도착했을 때 옆에 있던 아저씨가 국경심사를 위해 벨을 누르라고 일러줬다. 국경에서 나 혼자 내렸고, 버스는 그대로 국경을 통과했다. 외국인은 나 혼자였던 모양이다. 모르고 그냥 국경을 통과했으면 입국 도장도 받지 못했을 거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 봤던 정돈된 도시와는 반대로 차들이 뒤엉켜 있는 거리 뒤로는 시장과 커다란 상점이 가득했다. 아프리카를 다시 여행한다는 친숙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시우다드 델 에스테에 도착하자마자 ATM부터 찾아 파라과이 돈 과라니를 인출했다. 돈 단위가 제법 높아 10만 과라니 여러 장이 나왔다.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예약한 호스텔은 중심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나는 미련하게도 그곳까지 걸어갔다. 짐을 풀고 쉬다가 동네를 걸었다. 치안이 안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가게마다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다 길거리에서 파는 꼬치가 눈에 들어왔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는 보기 힘든 길거리 음식을 보자 반가웠다. 꼬치를 몇 개 집어 먹고 옆 사람과 되지도 않는 스페인어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시우다드 델 에스테는 ‘동쪽의 도시’라는 뜻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부근에 있어 교역도시로도 유명하다. 특히 관세가 낮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쇼핑을 한다고 들었는데, 단순 배낭여행자인 내가 쇼핑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나름 파라과이 제 2의 도시인데 관광지라고 할만한 곳이 딱히 없다. 얼마나 관광지가 없었으면 댐을 보러 갔을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세계최대 수력발전소인 이타이푸 댐(Itaipu)이 바로 이곳에 있다. 브라질과 파라과이 국경지대를 따라 흐르는 파라나 강을 막은 이타이푸 댐에서 생산하는 전력는 파라과이 전체 전력의 80%, 브라질의 26%를 차지한다고 한다. 게다가 투어도 무료로 운영되고 있으니 꽤 유익했다.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Asuncion)으로 이동했다. 버스터미널에서 구도심까지 꽤 멀어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걸렸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숙소를 찾았다.

 

정신 없었던 시우다드 델 에스테와는 달리 아순시온은 무척 평온한 분위기였다. 수도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시장 부근으로 가니 사람도 많고 시끄러웠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도 오래된 건물은 가득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오래되면서도 낡은 건물이 도심을 채웠다. 

 

역시 시장에 가니 먹을 게 가득했다. 앞서 갔던 두 나라에 비하면 물가가 엄청나게 싸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파라과이에는 한국 교민이 많다고 한다. 정말 어렵지 않게 한글 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장 골목을 헤매다 피곤함을 느껴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사실 파라과이에는 관광지라고 할만한 곳이 거의 없다. 아무리 내가 관광지를 따라 여행하는 편이 아니라 해도 이 나라는 정말 볼거리가 없던 것이다. 그래서 하루 일과라는 게 동네 한 바퀴 걷는 것, 그게 전부였다.

 

낡은 버스가 참 많았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으니 지나가는 버스에 타고 있던 어린 친구들이 먼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일주일간의 파라과이 여행을 마치고 나는 아르헨티나로 다시 돌아갔다. 마땅히 파라과이에서 넘어갈만한 다음 나라가 없었고, 아는 동생의 소개로 알게 된 아르헨티나 친구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파라과이의 고급버스인 NSA를 타고 로사리오(Rosario)로 향했다. 16시간을 달려 로사리오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4시 30분이었다. 난감했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호스텔에 갔는데 새벽 5시였음에도 체크인을 해줬고, 자고 일어났을 때는 아침도 먹으라고 권했다.

 

소개로 알게 된 줄리아노에게 로사리오에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내니 지금 당장 만나자고 답신이 왔다. 줄리아노의 차를 타고 로사리오의 강가로 가서 걸었다.

 

주말인데다가 날씨가 워낙 좋아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있었다.

 

다시 차를 타고 도시 외곽에 있는 다리로 갔다. 조금 멀긴 했지만 로사리오 도심이 눈에 들어왔다.

 

로사리오에서 지내고 있을 때 마침 2016 코파 아메리카 축구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숙소에서 만난 스페인, 페루, 멕시코 친구들과 함께 아르헨티나를 응원하러 식당에 갔는데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점수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저녁은 먹은 후 곧바로 이어질 멕시코 경기를 보려고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어디에도 멕시코 경기를 중계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확인할 때마다 멕시코의 상대팀인 칠레가 골을 넣어(결과는 0대 7) 멕시코 친구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로사리오에 머무는 동안 줄리아노를 한 번 더 만났다. 줄리아노의 다른 친구들과 동생을 함께 만났는데 이제 막 20살이 넘었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무척 중요하다고 하니 무척 신기해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모누멘토 아 라 반데라(국기 기념관)을 찾아 야경을 구경했다.

 

다음날은 아르헨티나의 공휴일 국기의 날(벨그라노 장군 서거일)이었다. 낮에 모누멘토 아 라 반데라을 다시 찾으니 많은 사람들이 나와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처음으로 국기가 게양된 곳이 로사리오고, 때문에 이를 기념하는 국기 기념비가 있다. 그 국기를 고안해낸 사람은 다름아닌 아르헨티나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 그래서인지 이곳 국기 기념비 아래에는 그의 유해가 있다고 한다.

 

모누멘토 아 라 반데라 부근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대통령도 왔다고 얼핏 들었는데 그만큼 국기의 날이 중요한 날인가 보다.

 

로사리오는 아르헨티나의 축구천재 메시의 고향이자, 쿠바의 독립영웅 체게바라의 고향으로도 알려져 있다. 시내에 체게바라가 살았던 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섰다. 그런데 체게바라의 집이 있다고 하는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서로 반대방향으로 알려줘 몇 십 분간 왔던 길을 걷고 또 걸었다. 한참 후에 찾은 체게바라의 집은 내가 생각했던 낡고 소박한 집이 아니었다. 창문에 쿠바 국기가 없었다면 여기가 정말 체게바라의 집이었는지 확신을 못했을 거다. 내가 체게바라 집을 코앞에 두고 못 찾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나는 로사리오에서 코르도바로, 그리고 칠레로 이동하려 했다. 그런데 만나고 싶었던 여러 사람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다고 소식을 전해와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분명 한 달 전에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입국했는데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라니. 어쩌면 내가 아무데도 가지 않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닌지 착각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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