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졸다가 창밖을 바라보니 마카오 도심지였다. 원래 가고 싶었던 곳은 기아 요새였는데 이미 저녁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에 당장 찾아가기엔 무리라고 판단하고 그냥 여기에서 내렸다. 무작정 버스에 올라타고 졸다가 내린 곳이 마카오 중심지였으니 나도 참 대책 없이 돌아다닌 것치고는 괜찮은 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마카오 어디에서도 황금빛이 반짝이는 높은 빌딩이 내 눈앞에 보였다. 바로 리스보아 호텔이었다.
세계문화유산을 둘러 볼 때는 마카오에서 높은 빌딩은 찾아보기도 힘들었는데 여기에선 높고 이런 번쩍이는 건물 앞에 서니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맞은편 역시 리스보아였다. 다만 호텔이 아닌 카지노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마카오가 카지노로 유명한 도시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돌아다녔는데 이제야 유명한 그 카지노를 발견한 것이다.
어차피 갈 곳도 없었지만 카지노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카오 카지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딱 하나 밖에 없었다. 내 여행에서 빠질 수 없었던 책인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의 주인공이 여기 마카오에서 대소 게임을 하다가 여행 경비를 전부 날릴 뻔 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행 초반에 나오는 카지노의 이야기가 어찌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지 책을 읽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카지노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나도 빠져들기에 충분했었다. 나는 책의 주인공이 어떤 것을 느꼈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홍콩에 있는 동안 모든 경비를 다 합쳐도 하루에 3만원 미만으로 썼던 나로서는 카지노의 입장이 무척 어울리지 않는 순간이었다..
카지노 입구에 들어가니 카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카드를 만드는 비용은 무료였고, 여권을 제시한 후 기본적인 정보를 작성하니 그 자리에서 발급해줬다. 그리곤 아무런 검사도 없이 아주 쉽게 입장을 할 수 있었다. 보통 호주나 다른 곳에서는 카메라를 들고 입장을 할 수 없었는데 이곳에는 확인도 안 하고 들여 보내줬다. 물론 안에서 촬영은 안 될 것으로 생각돼서 꺼내지도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온통 시끌벅적한 테이블 위에 사람들이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무슨 게임을 하고 있나 지켜보았는데 역시나 대소 게임 테이블이 가장 많았다. 대소 게임이란 주사위 3개를 통에 넣고 튕긴 뒤에 나온 숫자의 합이 크거나 작은 것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최소 숫자와 최대 숫자인 3과 18을 제외한 뒤에 4부터 10까지는 소, 11부터 17까지는 대였다. 물론 그 외에도 확률이 낮은 숫자를 정확히 맞추거나 대와 소가 아닌 3이나 18을 맞추는 방법도 있는데 당연히 높은 보상이 주어진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테이블 게임이 최소 배팅이 너무 높은 100홍콩달러였기 때문에 슬롯머신만 몇 번 해봤는데 순식간에 100홍콩달러를 잃었다. 괜한 짓을 했는지 후회가 밀려오던 순간이었다. 그냥 나가기에는 너무 아쉽다는 생각에 공짜 콜라를 마시면서 계속 구경만 했다.
다른 게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대소 테이블 앞에서 구경했다. 이 주변에는 온통 중국계 사람들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나는 주변 사람들을 살피면서 내 주머니 속에 있는 100홍콩달러를 만지작거리면서 배팅을 할지 말지 고민을 했다.
대소 게임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딜러였던 여성은 거의 무표정인 얼굴을 유지하면서 통 안에 주사위를 굴리는 스위치를 누르고는 사람들이 배팅을 하기만을 기다린다. 배팅이 거의 끝났다 싶으면 양손으로 테이블을 한번 X자로 휘저으면서 더 이상 배팅을 하지 말라고 했다. 주사위가 들어있는 뚜껑을 열면 바로 옆 전광판에 크게 大 혹은 小가 뜨고 주사위 숫자까지 나타난다. 사람들의 아쉬움 속에 돈은 딜러 손에 들어가기도 하고, 반대로 환호와 함께 작게는 2배의 돈을 따기도 한다. 그냥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도 ‘다음에는 소일까? 아니면 대일까?’라는 예측이 확률 상으로는 거의 50대 50라도 맞추긴 정말 어려웠다.
이제 대소 게임에 대해 거의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을 때 한 번 참여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은 대소 테이블에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고 있을 때 한 젊은 남자와 그의 애인인 듯 보이는 사람이 왔다. 당시 연속으로 소가 5번이 나온 상태였는데 이 남자는 어림잡아도 1000홍콩달러짜리 칩은 4개를 소에 걸었다. 사뭇 결과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돈이 많아 보이던 사람이긴 했지만 소가 연속으로 5번이나 나왔는데 또 소를 걸었다는 것은 무슨 자신감일까? 그런데 뚜껑을 열자 놀랍게도 소가 나왔다.
다시 배팅이 시작되었다. 전광판에는 지난 게임 결과가 나오는데 소가 연속으로 6번이 떴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 또 소에 5000홍콩달러치 칩을 걸었다. 나도 돈을 만지작거리면서 이 사람처럼 한번 걸어볼까 했는데 그냥 가만히 지켜봤다.
‘설마 또 따겠어?’
그런데 딜러가 뚜껑을 열자 또 소가 나왔다. 이제부터는 사람들이 이 남자와 반대로 걸지 아니면 똑같이 따라갈지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소가 많이 나왔다 하더라도 소가 나올 확률은 여전히 50%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이 남자는 소에 걸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100홍콩달러를 꺼내서 대에다 놓고는 속으로 이 남자를 비웃었다.
'멍청한 녀석 8번 연속으로 소가 나오겠냐? 나의 승리다!'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곧 200홍콩달러가 내 손으로 돌아오는 즐거운 상상을 했다. 그런데 나의 즐거운 상상은 정말 상상이었을 뿐 이번에도 또 소가 나온 것이다. 100홍콩달러는 순식간에 딜러 손에 들어갔고, 나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그냥 헛웃음만 지었다.
원래 카지노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큰돈을 따겠다는 생각도 없었으니 이만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200홍콩달러는 거의 내 하루치 생활비였다. 200홍콩달러가 분명 큰돈은 아니었긴 했지만 더 이상 있다가는 내 남은 돈까지 다 쓸 거 같아서 과감히 나가기로 했다.
거의 입구 밖으로 나왔을 무렵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여서 올라가봤다. 2층 역시 카지노이긴 했는데 아래보다 최소 배팅 금액이 50홍콩달러로 1/2정도 저렴했다. 홍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잊고 또 게임 테이블을 지켜봤다. 원래 도박에 빠지는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잃었던 200홍콩달러가 계속 떠올라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내가 보고 있던 대소 게임 테이블에서 연속으로 대가 5번이 나왔다. 나는 먹잇감을 엿보고 있는 하이에나처럼 기다렸다. 연속해서 대가 나온 뒤에 언젠가는 소가 나올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 그리고 몇 십 분 뒤에 연속으로 대가 8번 나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50홍콩달러를 소에 걸었다.
결과는 소였다! 50홍콩달러는 100홍콩달러가 되어 돌아왔다.
처음으로 돈을 땄다는 기쁨에 마구 걸었는데 순식간에 100홍콩달러를 잃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기회를 노렸다. 다시 연속으로 대가 나오고 있을 때 지금이 기회라는 느낌이 왔다. 이 50홍콩달러를 잃는다면 나는 당장 홍콩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결과는 소였다. 간신히 본전으로 복귀한 셈이다.
이제 게임에 대해 완전히 파악을 하고 있었던 나는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쉽게 걸지 않았다. 크게 걸지 않고 50홍콩달러씩 걸었는데 어느 순간 350홍콩달러까지 올라갔다. 이후에는 한번에 100홍콩달러를 걸었는데 놀랍게도 또 승리했다.
하지만 돈을 땄던 만큼 스트레스도 엄청났는데 특히 전광판에 이전 상황이 나오다보니 오히려 예측하기가 더 힘들었다. 어차피 대냐 소냐 50%의 확률만 놓고 예측하는 것인데 전광판의 결과들로 인해 더욱 고민하게 만들었다.
나는 600홍콩달러까지 땄다가 좀 더 욕심을 부린 탓에 150홍콩달러까지 떨어졌다. 잠시 쉬다가 다시 원래대로 차분하게 돈을 걸었다. 옆에 아저씨를 따라가 보기도 하고, 잠깐 쉬기도 했다. 예감이 좋지 않을 때는 아예 칩을 놓지 않았다. 비교적 룰이 간단한 게임이었지만 머리가 터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시 650홍콩달러까지 돈을 딴 후 이제는 홍콩에 갈 시간이라며 마지막 50홍콩달러를 걸었는데 졌다. 그래도 아무런 미련을 가지지 않고 칩을 현금으로 바꾼 뒤 밖으로 나왔다. 이미 즐길 만큼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카지노에 있었는지 밖은 어두컴컴한 상태였고, 현란한 네온사인이 번쩍였다. 낡고 오래된 건물들 밖에 보이지 않았던 마카오가 밤이 되자 홍콩 못지않게 현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내가 있었던 리스보아 카지노도 낮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원래 카지노를 자주 가본 것도 아니고, 남들처럼 돈을 따겠다는 목적이 적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돈을 따서 만족스러웠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이 바람도 나를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정말 재미있었던 것은 대소 게임보다도 내가 책의 주인공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것이었다. 책의 저자였던 사와키 코타로처럼 돈을 잃을 때마다 어떤 분석을 해보기도 하고, 예측을 하기도 했다. 연속으로 소가 나왔을 때는 대에 걸어서 잃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으로 돌아와서 집에 꽂혀져 있는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봤는데 놀랍게도 주인공이 갔던 곳이 리스보아 카지노였다. 사실 카지노는 안 가는 게 가장 좋은 법이지만 나는 돈을 따서가 아니라 30년 전의 여행가와 시차를 초월한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게 놀랍고, 즐거웠다. 사실 300홍콩달러도 한국 돈으로 따지면 4만원 조금 넘는 돈으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은 것에 비하면 큰돈은 아니다.
마카오의 밤은 화려했다.
이제 마카오는 충분히 둘러봤다고 생각하고 홍콩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여지껏 저녁도 안 먹고 카지노에서 게임을 했다. 역시 카지노는 무서운 곳이다.
기념사진이라도 찍어야겠다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 한 번 찍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바람이 불어서 덥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습했다. 이제 홍콩으로 돌아가기 위한 버스를 타기 위해 건물이 많은 쪽으로 걸어갔다.
정말 마카오의 밤은 홍콩의 밤 못지않았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는데 주변에 보이는 번쩍이는 건물은 죄다 카지노였기 때문이다. 아무런 계획 없이 마카오를 돌아다닌 것치고는 유적도 제대로 구경했고, 카지노에서 돈도 땄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여행이었다.
기억은 안 나는데 어떻게 버스에 탔는지, 마카오 항구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카지노뿐이었다.
30분 뒤에 무사히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참 신기하게도 마카오에서는 길을 헤매지도 않고 원하는 곳을 척척 갈 수 있었다.
나는 구룡반도(Kowloon)로 가는 배표를 구입 했는데 이상하게 올 때와 가격이 달랐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근데 마카오에서는 홍콩달러와 1:1로 통용이 되니 마카오 화폐 파타카를 단 한 번도 구경도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구룡반도까지는 딱 1시간이 걸렸다. 아침에는 워낙 파도가 거세서 1시간 반이 걸렸는데 아마 1시간이 정상적인 시간인가 보다. 파도가 심하지 않았으니 뒤쪽에서 토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 무척 쾌적했다.
홍콩에 도착한 뒤에 PC방에서 잠시 인터넷도 좀 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밖에서 뭔가 사먹었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너무 늦기도 했고, 비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져서 편의점에 들러서 라면 하나 사들고 들어왔다.
종류는 많고 맛은 전혀 모르니 진열된 것 중 비싼 것을 사가지고 왔다. 스프 종류도 4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향이 참 중국스러웠다. 보기에는 참 맛있어 보이는데 한 입 맛보니 역시 맛이 이상했다. 면만 겨우 다 먹었다.
아침 일찍부터 마카오를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늦은 밤에 홍콩에 돌아오니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마카오에서 돈을 땄으니 결과적으로 마카오 여행은 공짜로 한 건가?
그리 깨끗하지 않은 좁은 방에 누워서 커다란 선풍기가 돌아가는 것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무척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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