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면서 여러 형태의 숙소를 자보기는 했지만 게스트하우스 방바닥에서 이틀 자보기는 처음이다. 새벽에 무지하게 추운 에어컨 바람 때문에 온몸을 비틀면서 오징어가 되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에어컨을 끄고 다시 잠이 들었다.
힘겨웠던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되었다. 씻고 배낭을 챙기는 것으로 떠날 채비를 마무리 하고 어떤 여행자와 아침을 같이 먹으러 가게 되었다.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고 그냥 숙소에서 만나서 같이 다니게 된 것이다. 이 사람은 숙소를 새로 잡으려고 하던터라 배낭을 메고 이동하고 있었고, 나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동행자가 되었다. 이미 태국에 익숙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카오산로드를 벗어난 어느 게스트하우스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카오산로드의 대표 한식당인 동대문에서 김치말이 국수를 먹었다. 평소에 먹던 식사에 비하면 140밧으로 꽤 비싼편에 속했지만 시원하면서도 아삭한 김치말이국수는 전혀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후식으로는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카오산로드의 카페에서 마시면 보통 60밧은 하는데 이런 허름한 가게에서 먹으면 20밧이면 가능했다. 서로 누구인지도 통성명도 하지 않은 채로 카오산로드를 걷고, 아침을 먹은 뒤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중에 헤어질 때야 서로 이름을 묻곤 했는데 나쁜 머리로는 기억을 해낼 수 없었다.
폴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서 내 배낭을 챙겨들고 나왔다. 내가 처음 게스트하우스에 왔을 때부터 봤던 아저씨께 인사를 하고 미니밴을 타러 카오산로드로 걸어왔다. 유난히 장기여행자가 많았던 것도 있었지만 내가 치앙마이나 미얀마를 자주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친해진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막상 떠날 때가 되니 아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데도 언젠가 또 만나게 될 사람처럼 떠나는 자를 마중까지 해주러 밖에 나온다.
공항으로 가는 미니밴을 탔다. 이 미니밴은 카오산로드 주변의 숙소를 죄다 돌면서 여행자를 태우는 식이었다. 날씨는 더운데 에어컨 바람은 약하게 느껴졌다. 한참동안 여행자를 태우다 보니 어느새 가득차게 되었고, 내 옆자리에도 어느아저씨가 앉게 되었다.
수완나폼 공항까지 가는 동안 지루함이 느껴져서 그런지 옆에 있던 아저씨와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나이는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으로 보이던 핀란드 사람이었다. 내가 만난 외국인은 거의 대부분 한국 방문이 거의 없었는데 이 아저씨도 역시 안타깝게 한국에는 와본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분이라 유럽은 차량으로 많이 돌아봤다고 했다.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는데 정말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오고갔다. 핀란드의 사기적인 벌금에 대한 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이 아저씨 덕분에 공항까지 지루하지 않게 갈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즐거운 여행을 하라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헤어졌다.
내 귀국편은 정말 최악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방콕에서 홍콩으로 간 후 비행기를 갈아타고 타이페이로 향하는 항공편이었다. 문제는 타이페이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는 다음날에 있었는데 타이페이 공항은 밤에 체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내로 가거나 아니면 인근의 호텔에서 숙박을 해야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2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것, 그리고 무조건 타이페이에서 하루 체류해야 한다는 점이 내 험난한 귀국 여정길이었던 것이다.
이는 애초에 내가 알고 있었던 사실이기는 했다. 비행기 티켓을 구하지 못해서 3일동안 인터넷 사이트만 뒤지면서 겨우 구한 티켓이 바로 중화항공의 왕복티켓이었다. 당시에는 여행을 떠나기 고작해야 4일 전에 예약을 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했다. 게다가 초성수기인 12월 말에 싼값으로 예약을 했으니 돌아오는 귀국편은 애시당초 관심 밖이었다. 그래도 사람이란게 간사해서 그런지 최악인 귀국편이 직접 피부로 느껴지자 괜히 속으로 불평을 했다.
곧바로 대만으로 가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 받아들였다.
이번에는 대만으로 간다. 원래 목표는 미얀마 여행이었는데 태국과 대만을 거치다보니 원치않는 3개국 여행이 되어버렸다. 대만은 처음 가보는 것이라 조금 기대가 되기는 했다. 그런데 대만에 대해서 아는 사실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가이드북도 없고, 어디를 가야 관광을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타이페이에 도착하면 시내로 가서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내 자리는 창가였다. 귀국편이었지만 또 새로운 나라로 이동하니 대만 여행을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항상 기내식이 나오면 사진을 대충 한장 정도만 찍고 바로 먹기 시작한다. 난 돼지고기를 선택했는데 나쁘지 않았다.
약 4시간 뒤에 홍콩 공항에 도착했다. 항상 여행을 할 때마다 홍콩을 거쳐가서 그런지 인천공항보다도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공항이었다. 다행히 대기시간은 1시간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곧바로 타이페이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탈 수 있었다.
점심에 방콕의 수완나폼 공항에 있었는데 계속 비행기만 타고, 기내식만 먹다 보니 벌써 밤이 되었다. 이동만 하다가 하루가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지루하던 비행시간이 끝나고 타이페이에 착륙을 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리기 시작했다. 깜깜하던 밤하늘이었지만 내려다 보이는 타이페이는 노란빛과 하얀빛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빛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새로운 나라에 도착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여행자의 설레이는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당장 타이페이에 도착해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심사를 할 때가 되어서야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나만 반팔에 반바지 그리고 쪼리를 신은 차림새였다는 것이다. 더운 나라에서 왔다는 티를 내는 것도 모자라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타이페이의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아서 망정이지 만약 곧바로 한국행이었다면 훨씬 이상할 뻔 했다.
입국심사를 통과하고 난 뒤 나는 대만의 시내를 갈지 아니면 공항 근처의 숙소에서 머무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던 당시에 타이페이에서 스탑오버를 결정할 수 있었는데 내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다음날 12시에 비행기를 타야했다. 근데 타이페이에 도착한 시각은 밤 9시였다.
그래서 우선 공항 근처의 호텔을 예약하는 곳으로 가서 가격은 얼마인지 물어보기로 했다. 가격을 물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저씨가 "한국말로 하세요. 알아들을 수 있어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호텔의 경우는 호텔까지는 무료셔틀버스를 이용해 갈 수 있고, 1박에 1380원이라고 했다. 아직 대만 환율에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가격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왕 타이페이까지 왔으니 시내로 가기로 결심했다.
옆에 있던 인포메이션 센터로 이동해서 지도를 얻고, 시내로 가는 버스는 어디에서 타는지 물어봤다. 옆에 있던 대만사람에게 환전을 어느정도 하는 편이 좋을지 물어보기도 했는데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대충 생각해보니 2000원(대만달러)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100달러를 내고 2000원으로 환전하고 싶다고 하니 2000원과 35달러를 건네줬다. 물론 1달러도 아끼던 배낭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무지하게 큰 금액이기는 하지만 다음날이 귀국이었고, 대만에서 하루만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이정도는 써도 될 것 같았다.
막 떠나려는 버스(90원)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큼지막한 도로나 건물의 불빛을 바라보니 한국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내 뒤에는 외국인 커플이 앉아 있었는데 혹시나 싶어서 어디에 숙소가 있는지 물어봤지만 그들도 대만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미 그들은 예약을 한 호텔이 있었던 상태였고, 나는 거의 막무가내로 타이페이역으로 가는 중이었다.
잠시 후 그 커플이 나보다 먼저 내렸는데 행운을 빈다는 식으로 인사를 했다. 정말로 나는 행운을 빌어야 할 상황이 오기 시작했다. 타이페이역에 도착해서 주변을 살펴봤지만 도무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던 상황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곳 근처에는 코스모스 호텔이 있었는데 다른 호텔에 비해서는 저렴해 보이긴 했지만 여기도 배낭여행자가 묵을 장소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숙소가 어디있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때문에 들어갔다.
"저기... 이 숙소는 저렴하지는 않겠지요?"
어쩌면 나의 우스운 질문에 호텔 직원은 약간 망설이는듯 하더니 이내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대신에 싼 숙소가 있는 곳을 지도를 펼쳐 알려주었다. 거리는 이곳에서 멀지 않아 보였다.
이미 어두워질데로 어두워진 타이페이의 밤에 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카오산로드에 있었기 때문인지 여행자가 보이지 않는 타이페이의 도시는 무척 이질감을 불러 일으켰다.
아까 코스모스 직원이 알려준 곳은 길만 건너가면 나올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확실히 저렴한 호텔이 많이 보였다. 처음에는 우선 바로 보였던 호텔로 들어가 가격을 물어봤다. 가격은 1800원으로 내가 생각한 적정수준 보다는 비쌌다. 여기에는 호텔이 많아 보였으니 미련없이 밖으로 나왔다.
다른 곳은 얼마나 할지 어디를 가야 조금 더 저렴한지 찾고 있을 때 깔끔하면서도 잘생긴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아주 익숙하게 영어로 묵을 곳을 찾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는데 가격이 얼마냐고 물어보니 1690원이라고 했다. 내가 너무 비싸다고 얘기를 하니 깎아줄 수 있다고 했다. 얼마를 깎아줄 수 있냐고 물으니 우선 호텔로 들어와 보라고 해서 바로 앞에 있던 호텔로 들어가 카운터로 가니 1300원으로 깎을 수 있었다. 1300원도 대만의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에 비하면 비싼 편에 속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곳을 찾기엔 이미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싱글룸이 홍콩처럼 매우 좁기는 했지만 깔끔하면서도 시설이 좋아서 1300원이면 나쁘지 않은 가격대라 바로 체크인했다.
무작정 날아온 타이페였지만 배낭여행자는 어떻게든 잘 살아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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