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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날아온지 벌써 이틀, 그리고 다시 밤이 되었다. 난생처음 일본을 여행하고 있었지만 다른 곳을 여행했던 것처럼 똑같이 배낭을 메고 날아와서 아침부터 밤까지 무지하게 걸어다니고 있다는 점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날씨가 점점 추워졌다. 대낮에는 도저히 12월의 날씨라고 믿기기 힘들정도로 따뜻했는데 밤이되자 싸늘한 바람이 내 몸을 후벼파고 있었다. 그렇다고 옷을 꺼내 입자니 고쿠라역의 코인락커에 배낭을 집어넣은 상태라 다시 잠그려면 돈을 넣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정도 추위까지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그냥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모지코에서 고쿠라로 돌아오니 환한 불빛이 고쿠라역 주변을 수놓고 있었고, 한산했던 모지코보다는 확실히 사람도 많았다. 고쿠라는 미야자키로 가는 야간열차를 기다리는 도중에 잠깐 머물던 도시인데도 금방 적응이 되었다. 마치 며칠간 머물며 돌아본 것처럼 구석구석 골목까지 쉽게 눈에 익혀졌다. 

그렇게 난 고쿠라에서 혼자 열심히 돌아다녔다. 역 주변과 아케이드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꽤 많았지만 거기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거리는 한산했다. 


1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이니그마님으로부터 고쿠라역에서 만나자는 문자를 받았다. 여행은 같이 했지만 거의 따로 다녔기 때문에 만났던 사람도, 여행을 했던 장소도 전부 달랐다. 이렇게 가끔 밤에 만나서 이동을 하거나 숙소에서 얼굴을 봤던 것이 전부였다. 우리 둘다 혼자하는 여행이 익숙해서인지 따로 다녀도 전혀 이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다니는 여행도 나쁘지 않은 것은 서로 다른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나면 각자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항상 다른 장소를 여행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 다른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만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이날 똑같이 모지코를 다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대가 틀렸는지 서로 마주치지도 않았다. 


미야자키로 가는 열차는 2시간이 넘게 남은 상태였다.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아직도 고쿠라에서 시간이 남아돌다니 하루가 참 길게 느껴졌다. 우리는 동네 한바퀴를 산책하는 것처럼 돌아다니다가 어딘가 시간을 보낼 장소를 찾기로 했다. 


역근처 작은 골목길에는 마치 분식점처럼 보였던 아주 작은 가게가 있었다. 바깥에서 보기에도 매우 비좁아 보였고, 사람들은 서서 뭔가를 먹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나 혼자 걸어다닐 때 이 가게를 지나쳤었는데 이니그마님이 선택한 곳은 이곳이었다. 내부로 들어가니 겉으로 보이는 곳이 전부가 아니라 내부에 테이블이 있었고, 우리가 들어간 쪽에는 작은 간이 테이블이 있어서 주로 가볍게 마시는 손님들이 들어서는 곳으로 보였다. 

들어가자마자 습관처럼 사진을 찍었는데 옆에 있던 일본인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즉석으로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는 이니그마님이 가지고 있던 포토프린터를 이용해서 그자리에서 사진을 인화해서 줬는데 너무 좋아하셨다. 이렇게 즉석으로 현상이 가능한 포토프린터가 너무 신기하다고 했지만 사실 일본인이 일본제품을 보며 신기해하니 뭔가 이상했다. 


덕분에 맥주는 공짜로 마실 수 있었다. 아저씨는 인화된 사진을 받아들고는 무척 좋아하셨다. 


일본식 선술집인 이자카야와 달리 마치 포장마차에 온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나는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니 대충 상황만 파악하면서 맥주를 마실 뿐이었는데 이니그마님은 일본어가 가능해서 수많은 대화가 오고갔다. 좀 부럽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많이 답답했다. 

어느새 주인아저씨도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아저씨의 어머니가 한국인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낡고 빛바랜 사진을 꺼내서 보여줬는데 무척 흥미로웠다. 아저씨는 한국어는 거의 할 줄 몰랐지만 간혹 아는 단어를 몇 개 꺼내기도 했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먹었던 안주는 꽤 맛있었다. 저녁으로 스시를 먹었것만 안주도 열심히 집어먹고, 말은 안 통해도 맥주잔을 부딪히며 계속 마셔댔다. 그렇게 꽤 오랜시간 마셨을 때 주인아저씨는 11시가 되어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던 곳은 닫아야 한다며 가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옆쪽으로 빙돌아 가보니 가게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화려하지 않으면서 소박한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내부에 들어왔지만 내부 주방은 들여다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일본식이었는데 우리는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 다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주인아저씨는 우리가 안에 들어오자마자 사과를 깎아서 건네주기도 하고, 주문하지도 않은 회를 주기도 했다.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맥주를 쏜다고 얻어먹고, 가게 주인아저씨는 회를 내놓는 것이 과연 흔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서 그랬을까?


가게 안에는 여자 아르바이트생 2명이 있었는데 이제 막 대학생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오고갔지만 그래도 일본 사람을 만나서 함께 술잔을 부딪치는 것은 무척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특별한 장소를 돌아보는 것만큼 즐거운 것이 바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연신 귀여운(?) 포즈와 목소리를 했던 아주머니는 즉석에서 공연을 펼쳐보였다. 가게 안에 있는 손님이라고는 우리뿐이었지만 신나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박수를 치며 호응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보니 우리는 열차를 타야할 시간이 왔고, 가게는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재미있었던 인연이었다. 


헤어짐을 알리는 작별인사를 주고받은 뒤 짐을 챙겨들고 가게를 나왔다. 12시가 가까워졌으니 고쿠라의 거리는 한층 더 어두워진 상태였다. 열차를 타기 전까지 몇 분 남지 않아서 서둘러 고쿠라역으로 갔다. 


미야자키로 가는 야간열차는 12시에 출발했다. 다른 나라에서 야간열차나 야간버스를 많이 이용해 보기는 했지만 일본에서 야간열차를 타게 되다니 매우 독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열차는 기존의 다른 특급열차와는 달리 조금은 평범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열차의 내부도 야간열차라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야간열차라고 해서 침대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똑같았다. 덕분에 구부정한 자세로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큐슈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야간열차를 타고 큐슈남단의 미야자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