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쿠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6시였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이른 시각인데다가 비까지 내렸다. 분명 바쿠는 사막성 기후라 연간 강수량이 200mm밖에 안 된다고 들었는데, 첫날부터 비가 오는 건 대체 무슨 징조인 건지.
열차에서 만난 사람들과 손을 흔드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한 뒤 비를 맞으며 바쿠 올드 시티(Baku Old City)까지 걸어갔다. 살짝 내리는 비라서 그냥 맞으면서 걸으면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정말 홀딱 젖었다.
새벽이라 제대로 파악하긴 어렵지만, 바쿠의 첫인상은 '오래된 도시'였다. 실제로 거리를 걸으면서 본 건 러시아보다 훨씬 낡아 보이는 건물과 노란 불빛이 전부였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이긴 했어도 분명 달라 보였다.
올드 시티까지 그리 멀지 않았지만 막상 배낭을 두 개 메고 걸어가려고 하니, 결코 가깝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였다. 분명 지도에서 가리키는 곳에 도착은 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예약한 호스텔을 찾을 수 없었다. 정말이다.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 주소는 정확한데 도저히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사람에게 물어봐도 모르고, 심지어 어떤 터키인은 나보고 그 방은 다 차서 못 들어간다며 다른 호스텔을 안내해줬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이 숙소를 찾아가고 있다고 말해도 내 말은 듣는지 마는지. 어쨌거나 이상한 터키인의 안내를 뿌리치고, 내가 원하는 숙소로 다시 찾아갔다.
도저히 호스텔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계단을 따라 3층까지 올라가서, 주변을 살피니 창문에 얼굴을 내민 어떤 주민이 저기가 호스텔이라고 가리켜줬다.
저곳이 호스텔이라고? 근데 가까이 가보니 정말 호스텔이라고 적혀 있긴 했다.
문을 살짝 여니 가히 충격적이다. 원래 시설을 기대하며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는 편은 아니지만, 뭔가 숙박시설의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침대가 보이는 방이 하나 있고, 주방이 바로 옆에 있는데 그게 전부였다. 사람들은 다 자고 있는지 불은 꺼져 있어 어느 누구하나 나를 반기지 않았다. 비에 젖은 몸을 녹일 공간도 없고, 체크인을 할 수도 없었다.
나가서 다른 숙소를 찾아볼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었다. 때마침 밖으로 나가려던 여행자 2명을 만났는데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몇 마디 나눴다. 독일 남자와 헝가리 여자라고 했는데 아침부터 어딜 나가나 보다. 그들도 나가면서 이 말을 잊지 않았다. 여기 숙소 좀 이상하다고.
날이 점차 밝아졌을 무렵, 이 이상한 숙소에 주인은 전혀 보이지 않고 어떤 아주머니가 들어와 빵을 놓고 가버렸다. 난 주인인 줄 알았다. 몸은 젖어 있는데 체크인을 못하고 인터넷만 하게 됐다. 일단 체크인을 해야 짐이라도 풀고, 씻기라도 할 텐데.
잠시 후 백발의 한 아저씨가 침대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말을 하게 되었는데, 모스크바에서 바쿠로 열차 타고 왔다고 하니 무지하게 놀란다. 어떻게 열차를 타고 올 수 있냐며,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여태껏 아제르바이잔을 수없이 여행했지만 열차 타고 입국한 여행자는 처음 봤다는 것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열차 안에 여행자라곤 나 혼자 뿐이었으니. 아무튼 내 이야기에 엄청난 관심을 보이며, 더 말해달라고 하더니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사진을 같이 찍었다.
근데 내 3일짜리 비자를 보더니 나중에 출국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다. 대충 난 바쿠에서 이틀을 지낸 후 3일째가 되는 날에 트빌리시로 갈 예정이었는데, 열차를 타게 되면 분명 국경에서 3일이 넘어버릴 것이라는 얘기다. 난 전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덤덤했는데, 마크 아저씨는 내 여행에 관심을 가지면서, 꼭 국경을 어떻게 넘었는지 페이스북으로 알려달라 했다.
영국인 마크 아저씨와 30분가량 떠들고, 나는 체크인을 하지도 않은 채 씻기부터 했다. 아무래도 오전에 체크인을 하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마크 아저씨가 나간다고하기에 나도 짐을 놓고 점심 먹으러 따라 나갔다.
날이 완전히 밝아진 바쿠의 분위기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올드 시티의 분위기 말이다. 낡아 보이는 건물 사이로 좁은 골목이 있고, 그 바깥으로는 거대한 성벽이 있었다. 마크 아저씨는 첫날인데 어딜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아무런 여행 계획도 없었던 나에겐 이런 것조차도 여행의 일부였다. 계획에도 없는 바쿠 여행인데 어딜 가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난 미술품을 전시해 놓은 곳을 가도 상관없었고, 그냥 동네만 돌아다녀도 좋았다.
마크 아저씨는 아제르바이잔 미술 관련 책을 썼을 정도로 이쪽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걸 올드 바쿠 내에 있는 작은 전시회관을 갔을 때 알게 되었다. 물론 아제르바이잔을 수없이 왔다는 이 아저씨도 아제르바이잔의 비자에 대해선 강한 불만을 표했지만. 아무튼 일반적인 여행자라면 그냥 지나칠 전시회관(미술품을 판매하기 위한)을 들어가 보고, 덕분에 아제르바이잔이 예술로 유명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도 독특한 인테리어로 가득한 곳이었다. 가격은 9마나트로 배낭여행자에겐 살짝 부담이 되지만, 맨날 가는 것도 아니니. 점심을 먹으면서 마크 아저씨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예전에 비행기를 타지 않고 여행을 해본 적이 있다고, 무려 영국에서 일본까지 갔다는 것이다. 당연히 한국에도 와봤는데 놀랍게도 철자는 기억하지 못해도 문자 체계의 우수함에 반했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덕분에 심심하지 않아 좋았다.
바쿠에서의 첫날, 뭔가 좀 이상했지만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았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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